1979년 3월 25일 강해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이들의 삶저는 오늘 아침에 일어난 뒤 머리가 조금 복잡하여 성경 한 곳을 찾았습니다. 성경 전체 가운데 여호와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신에 대해서 한 마디도 언급되지 않은 에스더서입니다.
어제 저는 30년 만에 옛날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술을 마시는 자리에 꽤 긴 시간을 앉아 있었습니다.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데, 술잔이 왔습니다. 주는 대로 다 받아 놓았습니다. 친구들은 마시지 않더라도 혀끝만 살짝 대 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만 해 주면 자기들과 기분이 통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저는 혀끝보다 더 중요한 손으로 받았다는 것으로만 끝내자고 했습니다. 여러 사람이 제게 술을 권했는데 그래도 제가 마시지 않으니까 마시지 않으면 옷에 술을 붓겠다고도 했습니다. 저는 그래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옷이야 빨면 될 것 아닙니까? 억지로라도 마시게 하겠다는 친구도 있었지만, 결국 제 고집이 이겼습니다.
친구들은 제게 그렇게 해서 어떻게 세상을 사느냐고 했습니다. 저는 그 친구들에게 꼭 말해야 할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술집에서 통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술 마시는 자리가 불편하다고 해서 그 자리를 떠날 수는 없었습니다. 30년 만에 만난 친구들과 모인 자리에서 그냥 나온다는 것은 예의에도 어긋날 뿐 아니라, 그 친구들과 이별하는 것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성경 고린도후서 5장에는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9-10절)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이러한 사람들을 사귀지 말라고 했지만, 세상 사람들을 아예 사귀지 말라는 뜻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들을 멀리할 것 같으면 세상에서 나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바다 한 복판에 배를 타고 앉아 있거나 인공위성을 타고 달 같은 곳에 가서 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고전 5:11) 고도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난잡하게 살거든 그런 사람은 멀리하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도 닦는다는 생각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마음을 수양하고 정신을 통일하는 데는 최고의 자리였습니다. 제가 설교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이기 때문에 술을 마시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저는 술 마시는 사람들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제게는 이 세상에서 일생을 사는 동안 술을 마시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을 보니 모두들 저보다 약하고, 건강하지도 않아 보였습니다.
저는 친구들에게 술을 좋아하면 오래 살지 못한다, 짧게 살아도 건강하게 사는 것이 좋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술을 마시지 말라는 말은 아니지만 조금씩 줄이라는 말도 해 주었습니다. 이 친구들에게 말해야 할 것이 있었지만 그 자리에서 복잡하게 설교하고 싶지는 않아 조용히 참석만 하고 있었습니다. 술을 먹지 않는다는 것이 마음에 이미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마셔야 한다, 마시지 않겠다 하는 등의 정신적인 싸움은 없었지만, 하나님을 몰랐다면 비록 이런 자리에서 같이 술을 마실지라도, 상당히 외로웠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술을 마시고 떠드는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갈증과 괴로움을 그것으로 다 풉니다. 노래도 부르고 별 소리가 다 나옵니다. 친구들은 술도 한 방울 안 마신 저에게 노래를 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친구들에게 언젠가 해 주어야 할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노래를 하기 전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과거에 너희들과 헤어진 뒤, 오랜 세월을 외롭게 살았다. 형제가 없어서도 아니고, 부모가 없어서도 아니고, 내 가정이 없어서도 아니다. 전혀 외로움을 느끼지 않아도 될 상황이었다. 형과 동생이 있었고, 친구도 많이 있었다. 그런데도 외로웠다. 거기에는 원인이 있다.”그런데 친구들은 서론을 너무 길게 하지 말고 노래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쓸쓸한 강변에 태어난 인생아 너희는 무엇을 찾으러 왔는가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 돈도 명예도 사랑도 싫더라 (사의 찬미)
한 곡을 부르고 나니, 떠들던 친구들이 잠깐 동안 조용해졌습니다. 기차 소리에 놀란 닭처럼 둥그레진 눈들을 저는 볼 수 있었습니다.그 노래를 부를 때면 저는 항상 상상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 살던 사람들은 언젠가 이 세상을 마칠 것입니다. 그러자 옆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뼈로 보였습니다. 살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해골만 보였습니다. 우리 모두 머지않아 그렇게 되지 않습니까? 우리 육체는 끝이 있는 세상에서 떠들고 있지만, 생각은 영원을 향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 잠시의 세상에 끌리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점점 냉정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너희도 유쾌하고 떠들썩하지만 내 마음속에도 잔치가 있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은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찐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 15:17) 고 했습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 17:1) 고도 했습니다. 또 “고난 받는 자는 그날이 다 험악하나 마음이 즐거운 자는 항상 잔치하느니라” (잠 15:15) 하신 말씀도 있습니다. 이런 성경 말씀들이 정신 속에, 뼈에 묻히도록 저를 붙잡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 삶이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삶 아니겠습니까?
그 자리를 마치고 나오는데, 그중에 좀 점잖았던 친구가 저를 차에 태워 주었습니다. 차를 타고 가면서 그 친구는 제게 술을 마시지 않고 견디는 것이 참 이상하다, 어떻게 그 자리에서 그럴 수 있느냐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언젠가 긴 이야기를 해 주겠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저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술을 마시고 떠드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돈으로나 명예로나 무언가 채울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그렇게 떠듦으로써 그것을 채우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집이나 직장에서 눌려 살던 사람들이 예배당에 와서 찬송가를 크게 부르고 나니까 얼굴이 조금 펴지고 웃기도 하는 것이나 기도를 열심히 하고 나서 기분이 풀리는 것과, 술집에서 술을 마시며 떠들고 실컷 노래를 불러서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곳에 하나님이 없다면 그 마음 쓰는 것은 똑같지 않겠습니까?
저도 어릴 때 교회에 다니면서 마음에 하나님 없이 찬송가를 많이 불렀습니다. 하나님과 관계없는 기도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실컷 떠들며 노래하는 것이나, 그런 노래 대신 찬송가를 부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성경은 그런 사람들을 이야기하면서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 5:18) 고 했습니다. 술 취하는 것과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을 비교해 놓은 이유가 어디 있는지, 저는 어젯밤 조용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성경 에스더서를 읽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말이 전혀 나오지 않는 성경을 한번 찾아 보자는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에스더 1장 - 와스디의 폐위에스더 1장부터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이 일은 아하수에로 왕 때에 된 것이니 아하수에로는 인도로 구스까지 일백이십칠 도를 치리하는 왕이라 당시에 아하수에로 왕이 수산 궁에서 즉위하고 위에 있은 지 삼 년에 그 모든 방백과 신복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니 바사와 메대의 장수와 각 도의 귀족과 방백들이 다 왕 앞에 있는지라 왕이 여러 날 곧 일백팔십 일 동안에 그 영화로운 나라의 부함과 위엄의 혁혁함을 나타내니라 이날이 다하매 왕이 또 도성 수산 대소 인민을 위하여 왕궁 후원 뜰에서 칠 일 동안 잔치를 베풀새 백색, 녹색, 청색 휘장을 자색 가는 베줄로 대리석 기둥 은고리에 매고 금과 은으로 만든 걸상을 화반석, 백석, 운모석, 흑석을 깐 땅에 진설하고 금잔으로 마시게 하니 잔의 식양이 각기 다르고 왕의 풍부한 대로 어주가 한이 없으며 마시는 것도 규모가 있어 사람으로 억지로 하지 않게 하니 이는 왕이 모든 궁내 관리에게 명하여 각 사람으로 마음대로 하게 함이더라 (에스더 1:1-8)
4절에 보면 “왕이 여러 날 곧 일백팔십 일 동안에 그 영화로운 나라의 부함과 위엄의 혁혁함을 나타내니라”고 했습니다. 잔치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백색, 녹색, 청색 휘장을 자색 가는 베줄로 대리석 기둥 은고리에 매고 금과 은으로 만든 걸상을 화반석, 백석, 운모석, 흑석을 깐 땅에 진설하고”라고 했습니다. 의자가 금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만큼 영화로운 생활을 했습니다. 또 술을 억지로 마시게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술좌석에 앉으려면 이런 데 앉으면 좋기는 하겠지요. 분위기가 상당히 자연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에스더서에 대해서 ‘뭐, 옛날 이야기겠지. 종교의 경전이겠지.’ 하는 정도로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에스더서 내용은 역사적인 기록의 한 장면입니다. 바사는 페르시아이고 아하수에로 왕은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 1세입니다. 언어가 달라서 아하수에로라는 말로 표현되었습니다만, 원래 이 사람은 크세르크세스 1세입니다.
성경의 기록을 보면 그 시대 배경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이 없었다면 페르시아 왕국의 역사를 조사할 수 없었습니다. 고대 역사가 이미 모래에 묻혔기 때문입니다. 페르시아 이전에 있었던 바벨론 제국도 성경이 없었다면 찾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바벨론 제국 이전의 아시리아 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럽에 있는 많은 역사 학자들이 성경을 공부하고 연구하면서 이러한 나라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동으로 동으로 나아가서 모래와 흙을 파고 헤쳐 발굴 작업을 했기에 역사 속의 고대 문명들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에스더서의 내용은 아시리아 시대가 지나고, 바벨로니아 시대가 지난, 페르시아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페르시아라고 하면 멋있는 이야기가 많이 전해져 옵니다. 페르시아 공주니 페르시아 왕자니 별별 이야기들이 다 있습니다. 페르시아 다음에 헬라, 그리스 시대가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로마입니다. 이렇게 역사는 연결되었고, 그 제국들의 지배하에 있었던 이스라엘은 성경을 기록해 나갔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을 읽고 같이 기도를 하자든지 찬송을 하자든지 신을 잘 섬기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내용을 통해 한 민족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고 그 민족의 역사 속에 신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속에 나타난 그 힘이 무엇이었던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그 힘에 의해서 현존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그 힘을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 힘이 인간에게 나타나기 전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봄 기운이 돋고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때,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싹이 올라옵니다. 또 자랍니다.
그것은 무엇으로도 끌어올릴 수 없는 힘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대자연의 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을 ‘자연’이라고 불러도 좋고, ‘저절로’라고 불러도 좋고 어떻게 불러도 좋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속에는 하나님이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이 내용은, 한 민족의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살았으며 무엇 때문에 죽느냐 하는 문제, 왜 죽게 되었고 왜 살아야만 되느냐 하는 문제, 왜 그들은 살아야만 되고 죽으면 안 되는지에 대한 이유가 여기 나타납니다.
바벨론 제국이 무너졌을 때, 페르시아가 그곳을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세계 역사는 과거나 지금이나 많은 침략자들, 통치자들, 독재자들에 의해서 통치되어 왔고, 그것이 계속 반복되며 흘러왔습니다. 그중에 한 통치자가 바로 이 아하수에로 왕입니다. 그는 많은 땅을 점령한 뒤, 그 넓은 땅을 차지한 것을 과시하는 잔치를 180일 동안 열었습니다. 어느 학자는 이때가 BC 486년에서 BC 465년 사이라고 역사책에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잔치라고 하면 흥겹게 연주하고 노래하는 것을 떠올립니다. 잔치 중에 최고의 잔치를 생각하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이 사람들의 잔치는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대단히 호화스러웠습니다. 은잔도 아니고 금잔으로 술을 마셨다면 그 잔치가 어느 정도로 화려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을 믿은 뒤 천국에 가서 얻을 금 면류관이라든지 황금 길이라든지, 그런 것만 바라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금이 하나도 없어도 좋은 곳 아닙니까?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찬송가 85장)
예수 없는 곳은 금이 아니라 다이아몬드를 깔아 놓아도 소용없다는 이야기를 한 적 있는데, 이 아하수에로가 연 잔치는 인간 세상에 있어서 아주 멋있고 화려한 잔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큰 잔치 후에는 씁쓰레한 일들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신약 성경을 보면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요 7:37)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명절 잔치 때 실컷 마셨을 사람들에게 또 목마르거든 와서 마시라고 하십니다. 육체의 갈증이 아니라, 영혼의 갈증이 있기 때문에 그 갈증을 채우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그런 장면들이 자주 나옵니다.
에스더서의 내용을 보면, 이 거대한 잔치가 열리는 가운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왕후 와스디도 아하수에로 왕궁에서 부녀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니라 (에스더 1:9)
왕후도 ‘나만 가만히 있어서 되겠나.’ 하는 생각에 대신들의 부인을 모두 모아 놓고 잔치를 벌였던 것 같습니다.
제칠일에 왕이 주흥이 일어나서 어전 내시 므후만과 비스다와 하르보나와 빅다와 아박다와 세달과 가르가스 일곱 사람을 명하여 왕후 와스디를 청하여 왕후의 면류관을 정제하고 왕의 앞으로 나아오게 하여 그 아리따움을 뭇 백성과 방백들에게 보이게 하라 하니 이는 왕후의 용모가 보기에 좋음이라 그러나 왕후 와스디가 내시의 전하는 왕명을 좇아 오기를 싫어하니 왕이 진노하여 중심이 불붙는 듯하더라 (에스더 1:10-12)
왕은 당시 세계의 대 영웅이었고, 독재자였습니다. ‘누가 감히 나를 거역하겠느냐.’ 하던 왕이 왕후를 불러서 술잔을 채우게 했던 모양입니다. 왕은 왕후의 면류관을 격식에 맞게 차려입고 나타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와스디는 상당히 가
정회원으로 가입하시면 전체기사와 사진(동영상)을 보실수 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