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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 내 마음에 내려앉은 ‘주님’이라는 두 글자

정정숙 | 대구       구원받은 이후 해 놓은 것이 하나도 없는 내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 보면 주님 앞에서 부끄럽기만 하다. 그렇지만 결국에는 나를 잡아주는 처음의 그 마음을 귀한 시간을 맞아 되새겨 본다.     생각의 굴레에 빠져 있던 어린 시절     나는 흔히들 말하는 모태신앙은 아니었다. 본적은 경상북도 성주군, 1남 3녀 중 차녀로, 태어나기는 서울에서 났지만 1970년도 가족들의 미국 이민에 착오가 있었던 탓에 부모님은 부산으로 가려다가 대구에 정착하셨고 나는 대구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전문직에 종사하셨지만 신체적, 정신적으로 많이 허약하셨던 탓에(우울증) 어머니가 가계와 살림을 꾸려야 하는 이중고를 겪으셨다.     금전적으로 힘들지는 않았기에 다행히 부족한 것 없이 유년 시절과 초등 시절을 보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중고를 겪으시는 어머니의 가정 내에서의 역할이나 아버지의 가장으로서의 역할이 부재했던 탓인지 내 잠재의식 속에는 항상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었고 정서적으로도 불만이 많았던 것 같다. 어른들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내게 했다던 내 유년 시절의 모습, 턱을 괴고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모습이 많았다고 하시는 것을 보면 내 잠재의식은 아버지의 유전인자를 유독 많이 물려받았나보다. 그때 그 시절, 무슨 생각들을 했던 것일까? 모르겠다. 혼돈하고 공허한 인생의 마음이 그 조그마한 아이에게도 시작되었던 것일까.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면서도 그 ‘생각’이라는 알 수 없는 복잡한 굴레는 계속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초등 시절쯤으로 기억된다- 아버지께서 작은 부주의로 큰 사고를 당하셨다. 그 일을 계기로 어머니는 마음이 너무 힘드셨는지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셨고 나름대로의 율법주의자가 되어 버리셨다. 그때부터 나는 싫지만 억지로 등 떠밀려 교회의 주일학교에 나가야 했다. 주일만 되면 교회에 가야 하는 중압감에, 자유롭게 절에 다니는 친구가 부러울 정도였다. 교회에 있어야 할 시간에 다른 장소(인근 만화방이나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어머니의 눈을 피해 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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