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2010. 5. 15
그에게서 온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에베소서 4:16)
성전 준비를 한 다윗, 성전을 지은 솔로몬
사람에게는 눈이 두 개 있습니다. 그런데 한쪽 눈을 감고 눈 감은 쪽 팔을 뻗어 돌려 보면 그 팔이 보이지 않습니다. 한쪽 눈으로만 사물을 보면 두 눈으로 볼 때보다 시야가 훨씬 좁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두 개의 눈을 주신 이유는, 보아야 할 것들을 정확하게 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른쪽 눈을 감고 보았을 때나 왼쪽 눈을 감고 보았을 때 똑같이 보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눈을 모두 뜨고 보아야 시야가 넓어지고 초점이 또렷하고 정확하게 맞습니다. 또 그랬을 때 뇌의 판단력도 훨씬 더 날카로워집니다. 성경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 같고 내용이 지겹게 느껴질 때도 있겠지만, 성경을 접할 때 한쪽 면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말씀이 계속 반복되는 것 같아도 두 이야기에 모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말씀이 나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는 길잡이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 1:18-19) 하고 기록된 에베소서 1장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열왕기상에 나타난 솔로몬에 대한 내용은 역대하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이 살던 당시의 시대적 사건들은, 앞서 언급했던 한쪽 눈으로 보는 것과 양쪽 눈으로 보는 것의 차이를 느끼게 하는 데 아주 좋은 예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솔로몬이 이스라엘 성전을 짓기는 했지만, 그 성전은 솔로몬 혼자 지은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없었더라면 솔로몬은 그 성전을 지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왼쪽 눈이 더 귀한지 오른쪽 눈이 더 귀한지 따질 수 없습니다. ‘나는 오른손잡이니 오른손이 더 필요하다.’ 하더라도 왼손이 없으면 안되듯이, 우리가 성전을 ‘솔로몬의 성전’이라고 부르지만 그 성전을 지을 수 있는 조건은 모두 다윗이 갖추어 놓았습니다.
다윗은 성전을 지을 수는 없었지만, 성전을 짓는 일을 위해 먼저 자신의 사유재산인 금을 바쳤습니다. 그러자 많은 장로들과 제사장들이 그런 다윗의 모습을 보고 그 일에 동참했고, 성전을 짓고도 남을 만큼의 재료들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때 다윗의 마음이 벅차고 기뻐서 감사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대상 29장 참조)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에게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대상 22:8)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너는 그 전을 건축하지 못할 것이요 네 몸에서 낳을 네 아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리라” (왕상 8:19, 대하 6:9) 고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3천 년 전의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 번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셨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결정하신 것을 그 세대가 아닌 다음 세대에서 이루셨습니다. 이것을 사람의 육체에 비교하자면, 하나의 모습과 같습니다. “그에게서”,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엡 4:16) 라고 되어 있습니다. 머리가 되는 생각으로부터 모든 일이 시작되어 뻗어나갑니다. 우리 몸의 혈관들이 동맥과 정맥으로 뻗어나가 갈라지듯이 성경도 크게 구약과 신약의 두 줄기로 나뉩니다.
다윗은 일평생 전쟁을 했고, 피를 보며 살면서도 성전을 짓기 위한 모든 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다윗이 성전을 위해 준비한 모든 것으로 솔로몬이 하나님께 영광을 바칠 수 있는 성전을 지었습니다. 우리는 이 일이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 속 이야기들은 지금 내가 속한 상황에서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행동을 해야 할 것인가를 가늠할 수 있는 잣대가 되기도 합니다.
볼품없는 겉모습의 성막과 영광된 모습으로 세워진 성전
열왕기상 5, 6장에서 솔로몬이 지어 나가는 성전은 모세가 만들었던 성막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것이 더 귀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전에 돈이 더 많이 들어갔으니 성전이 더 귀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막의 가장 바깥쪽에는 해달의 가죽이 덮여 있었습니다. 해달의 가죽은 모래바람이 불고 건조한 사막 기후로부터 성막 안에 있는 정금으로 만들어진 많은 기물들을 보호할 수 있는 재료였습니다. 성막은 그 속이 번쩍번쩍했지만 겉은 가죽으로 덮여 보잘것없었습니다. 신발을 신고 걸어 다니면 신이 닳게 됩니다. 신발이 많이 닳았다는 것은 그만큼 신발이 내 발을 보호해 주었다는 의미입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언약궤나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 둔 언약의 비석들, 기물들이 보호되기 위해 해달의 가죽으로 덮여 이스라엘 민족에 의해 사막을 옮겨 다니던 성막은, 오랜 기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후 사람의 몸을 쓰고 이 세상에 오셨지만 인생이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도 없고 인간적으로는 볼품없어 보였던 고난 받는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이 성막은 열왕기상에까지 그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이 기브온 산당에 제사를 지내러 갔을 때 거기에 모세가 만들었던 회막이 서 있었다는 기록이 성경에 있습니다. (왕상 3:4, 대하 1:3 참조) 물론 그때 언약궤는 이미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짓게 되는 성전은 규모만 해도 성막의 네 배나 됩니다. 길이가 두 배, 너비가 두 배입니다. 높이는 성막의 세 배나 되었습니다. 재료도 가죽이 아니었습니다. 레바논에서 백향목을 잘라서 가져오고 돌도 다른 곳에서 가공해 가져와서, 성전을 만들기 위해 연장으로 치는 소리가 나지 않는 상태에서 조용히 지어졌습니다. 7년이라는 기간 동안 아주 멋진 모습으로 지어져 언약궤를 놓아 둔, 하나님이 계신 곳이 바로 성전입니다.
이 성전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고난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일으켜 세우셔서, 지금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당신께서 세상에 계실 때 이루신 일들을 아버지 하나님께 그대로 간증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는 성전이 세워졌듯이 영광 중에 오실 것입니다.
고난받고 영광받으시는 예수님의 이 두 가지 모습은 역사적으로 성막과 성전을 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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