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2010. 5. 8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 (열왕기상 3:9-10)
인간의 육체와 무척 닮은 성경 말씀
전에 비행기 안에서 영화를 한 편 보았습니다. 공상과학 영화였는데, 물론 허무맹랑하게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영화의 배경은 먼 미래로, 이 세상에 오직 한 권의 성경책만이 남아 주인공은 30년 간 그 성경책을 지켜 왔습니다. 그리고 주인공은 자기가 가진 성경을 퍼트리기 위해 최후의 문명 도시로 여행을 떠납니다. 그런데 악당이 등장해서 성경책을 빼앗아 그것을 이용해 세계를 장악하려 하고, 주인공은 이 악당에게 총을 맞고 성경책도 빼앗깁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성경책은 맹인들이 보는 점자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주인공만이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인공은 죽어가면서 마지막에 누군가에게 종이와 펜을 가져오게 하고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를 죽 외워 읊어 줍니다.
영화 내용은 성경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허구의 이야기일 뿐이지만, 주인공이 죽어가면서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 22장 마지막까지를 읊고 그 내용을 옆에서 누군가가 받아 적는 장면을 보면서, 영화를 만든 사람이 성경의 내용은 잘 몰라도 성경이 귀하다는 것은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 성경을 얼마나 귀하게 생각할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해어졌으나 (찬송가 234장)
우리는 입으로는 이런 찬송가를 부르지만, 정말 성경을 닳도록 본 적이 있습니까? 사랑한다고 말은 하지만 이 성경이 얼마나 귀한 책인지 매일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저는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해 주신 육체와 성경이 매우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는 말씀이 있고,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창 1:26) 하는 말씀도 있습니다. 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레 17:11) 는 말씀도 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이 몸은, 죽어서 땅에 묻히면 흙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속에 생명을 불어넣으셨습니다.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창 2:7 참조) 이 생령은 영원합니다. 우리 몸처럼 성경도 태워 버리면 책 자체는 없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생명은 없어질 수도 없고 없어지지도 않습니다. 그 성경 말씀이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었습니다.
또 성경에는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엡 4:16)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에스겔서 37장에는, 뼈들이 쌓여 있는데 그 뼈들에 생기가 들어가자 서로 들어맞아 가면서 마디가 연결되고 힘줄이 생겨 사람의 모습으로 일어나는 것을 에스겔이 보았다, 그것이 이스라엘이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성경이 아니라면 아침에 눈을 떠서 잠이 들 때까지 스스로를 느끼고 보고 숨 쉬고 하는 나라는 존재를 과연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이 해답을 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의미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고 태어나서 살다가 말씀 속에서 한 번 변화를 받아 거듭났다는 정도는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교제 가운데 알게 되는 말씀들과 ‘나’라는 한 인간의 관계, 그리고 성경 말씀과 ‘우리’라고 하는 교회의 관계, 이런 것들을 조금씩 알게 되면 하나님의 위대함과 내 영혼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의 위대함을 더욱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 몸의 많은 부분들은 두 개씩 있습니다. 눈도 두 개, 콧구멍도 두 개, 귀도 두 개, 손도 두 개, 대뇌도 우뇌와 좌뇌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몸도 정확하지는 않지만 왼쪽, 오른쪽이 거의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사람은 그렇게 양쪽을 움직이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같은 내용을 다르게 설명해 놓은 곳들이 있습니다. 잠언 26장 4절과 5절을 보겠습니다.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두렵건대 네가 그와 같을까 하노라 (4절)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그에게 대답하라 두렵건대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까 하노라 (5절)
어떤 미련한 사람이 우리 앞에 나타나서 마구 말을 할 때, 거기에 대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겠습니까, 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겠습니까? 대답을 하면 4절을 어긴 것이 되고, 하지 않으면 5절을 어긴 것이 됩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이런 내용을 읽으면서 참 궁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그 뜻을 정확하게는 모르겠습니다만 어렴풋이는 알 것 같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는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2:16-17) 고 하셨습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들지 않으셨으면 문제가 간단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신 것이 하나님의 실수입니까, 하나님의 계획입니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창조물 속에서 하나님의 보시기에 ‘악’인 것이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사 14:12) 하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보좌를 보며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사 14:13-14) 고 마음먹었던 사탄의 생각을 아시고, 그와 전쟁을 치르고 계셨습니다. 그랬기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세상의 역사를 경영해 가신 것입니다. 그 원칙에 따라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만들어져 사람 앞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인간에게는 그 실과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 하는 문제만 숙제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에 어느 내용에 대해 무조건 한 쪽 면만 기록되어 있었다면, 하나님의 섭리나 계획이 우리에게 강하게 다가올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감탄을 하게 됩니다.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그리고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그에게 대답하라” 하신 그 갈림길에서 우리 마음속에서는 어느 쪽으로 갈 것인가 하는 싸움이 일어납니다. 교회 시대를 사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그 갈림길의 답은 교제 속에서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개인이 답을 내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우리 육체는 어떠한지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 몸에 흐르는 피 중에 동맥피가 낫습니까, 정맥피가 낫습니까, 아니면 둘 다 좋습니까? 우리 몸속에 흐르는 피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우리가 산소를 들이마시면, 산소를 받은 폐는 심장의 우심실에서 넘어온 피에 산소를 전달합니다. 그러면 피가 산소를 붙잡고는 좌심방으로 이동해 동맥을 통해서 온 몸으로 퍼집니다. 그 피는 대동맥으로, 세동맥으로, 그 다음 모세혈관까지 갑니다. 그곳에서 세포와 산소 교환을 한 다음 정맥으로 넘어가 심장으로 돌아오는데, 그 피를 정맥피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동맥피와 정맥피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이것은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우리는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는 지혜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데, 그 지혜를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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