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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1> 복성동 시절

김재순    내 고향은 보성면 복성에서 한 8km쯤 떨어져 있는 데인데, 거기서 복성으로 시집을 왔지요. 어릴 때 장로교회를 다녔는데, 어머니가 권사로 계셨지요. 나는 소학교를 일본 홋카이도에서 다녔어요. 6학년 졸업을 하고 중학교를 들어가서 다니는데,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내려가지고 어른들이 다 나올 때 한국으로 나왔지요.     한국이 우리 고향이라고 왔는데 뭐 아무 것도 없잖아요. 그 때는 참말로 먹을 것도 없고 보니까 보리죽이 있더라고. 배도 고프고 하니까 어머니는 나를 좋은 자리에 시집보내려고 했어요. 나는 시집이 뭔지도 몰랐잖아, 한국말도 잘 할 줄 모르고. 결혼하라고 하니 결혼이 무언지도 모르고 구시대 식으로 마당에서 절하고 그렇게 가마 타고 열일곱 살 때 시집을 왔지요. 시집을 왔는데 거기도 또 어려워요. 시댁이라고 간 데도 어려워서 배부르게 먹으려고 시집 간 사람이 매번 배곯았어요, 배고프고. 남편은 작년 봄 3월 13일에 86세로 세상 떴어요. 나하고 나이 차이가 많거든. 그래도 나를 배불리 먹이려고 우리 어머니가 결혼시켜버린 거라요.     애들 하나 둘 낳고 있다 보니까 세월이 지나 서른세 살이 됐더라고요. 그 때 우리 어머니는 서울에 살았거든요. 배불리 먹으라고 나를 결혼시켜 놓았는데 시댁이 교회를 안 다니니까 가슴이 아파서 시아버지하고 싸우기도 하고 천당이니 지옥이니 고함을 지르기도 하고 그랬다고요. 우리 집은 두 살 터울로 애를 자주 낳아서 나는 애 보느라 바쁘고, 시어른도 반대하고 하니까 교회에 안 다녔다고요. 그때 시동생은 동장 일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 때 대구에서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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