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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 한 혈통으로 만드사

2001년 국내외 성경탐구모임     이 소리는 제33회 국내외 성경탐구모임 중 2001년 7월 30일 오후 강연을 정리한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성경을 가까이하게 되었는가성경을 이야기하다 보면 ‘어떻게 내가 성경을 이야기하게 되었나.’ 하는 생각이 종종 듭니다. 마치 억세게 생긴 사나이가 아가씨 옷을 입고 힐을 신고 거리를 어기적거리며 걸어가는 것처럼, 제 성격을 보면 성경 이야기를 하는 것과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성경과 상당히 거리를 두고 살아왔습니다. 그런 제가 어떻게 성경을 알게 되었고, 이 성경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게 되었는지,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언젠가 집에 있는 사진들을 들추다가 낡은 옛날 사진을 발견했습니다. 사진 속의 저는 천으로 된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조그마한 화판 하나를 들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 나이는 열아홉, 스물 정도였는데, 그 무렵의 저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이야기하는 지금의 제 모습이 될 만한 싹조차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디든지 가면 그림을 그리고 앉아 있었을 뿐, 성경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스물두 살 이전의 저에게 유명하다는 점술가나 점쟁이가 ‘당신은 앞으로 성경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면 저는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성경은 거룩한 체하는 목사들이나 고상한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일 뿐, 나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느 집회 장소에 가서 귀동냥이나 하는 정도이지 누군가에게 성경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고,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어느 날부터 성경을 이야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긴 세월에 걸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어느 날부터 그렇게 되었습니다. 젊을 때 일입니다. 한번은 일요일 날, 식당에 가는 길에 친구를 만났습니다.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었더니 그 친구는 ‘이것 하잖아.’ 하면서 전도지를 한 장 주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받아들고는 ‘사람은 생겨먹은 대로 산다고 하더니, 네가 꼭 그렇구나.’ 생각했습니다. 그 친구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다른 학교에서 전학을 왔는데, 저는 그를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술 마시는 자리에서도 그 친구는 술을 한 잔 들고 기도를 한 후 마셨습니다. 기도를 하지 않든지, 술을 마시지 않든지 둘 중 하나만 해야 하는데, 기도도 하고 술도 마시니까 무언가 맞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런 친구가 제게 전도지를 주며 자기 교회에 한번 오라고 한 것입니다.   그날은 당시 제가 하던 운동의 심사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를 그렇게 보내고 나서 생각해 보니 그 애가 나에게 오라고 하는 데에는 무슨 이유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친구를 만나러 갔는데 첫 번째도 만나지 못하고, 두 번째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만나러 갔을 때도 그 친구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 교회에서는 서양 사람들이 나와서 설교를 했는데, 어느 날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시를 쓰라고 했습니다. 그 시를 다음 주 토요일에 발표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에 대해서 시를 쓰려고 하니까 쓸 것이 없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주일학교를 다녔지만 예수에 대해 아는 것 중에는 시로 옮길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 하나님 하면 생각나는 것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질 때 동네 방천이 무너질까봐 걱정하면서 동네 교인들이 모여 기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둑이 무너지면 동네가 물에 휩쓸리니까 교인들이 모여서 ‘하나님, 이번에는 봐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는 모습들을 어려서부터 보아 왔습니다. 또 종교적인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제가 많이 아플 때면 교회에서 온 분들이 기도를 해 주기도 하셨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지내면서 제가 알고 있는 예수는, 물 위로 걸어가는 예수, 병든 사람에게 안수해서 낫게 하는 예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그런 예수였습니다. 예수에 대해서 설명하라면, 들은 것이 많아 말은 할 수 있었습니다. 교인들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교회에서 말하는 심방이나 설교, 부흥회라는 것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렇게 일반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기본적인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만, 나와 예수가 직접적으로 어떤 관계인지는 전혀 몰랐습니다. 그래서 정작 예수에 대해서 말하라 할 때 별로 말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주 시 발표회에서 제가 쓴 시가 1등을 했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쓴 시가 1등을 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찼습니다. 수개월 전에 만난 적이 있던 미국인이 상으로 성경책을 주었습니다. 그때 제 마음속에는 ‘하필이면 왜 저렇게 큰 성경을 주나. 주려면 주머니에 들어갈 만한 조그마한 것을 주든지, 아니면 문학 전집 중 내가 읽지 않은 책 한 권을 주면 좋을 텐데. 하필 저 짐 덩어리 성경, 일요일만 되면 내 시간 다 뺏는 성경을 주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요일에는 꼭 교회에 가야 된다고 생각했고, 교회에 가지 않으면 죄인이 된 것같이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상으로 받을 때 제 표정이 안 좋았던지, 상을 주던 그 미국인은 저를 보더니 이 사람은 성경책을 주어 보았자 읽을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성경책이 저에게 돌아갈 상이 아닌 것 같다고 하면서 1, 2, 3등 세 사람에게 눈을 감으라고 하고는 앉은 사람들에게 누구에게 상을 주기를 바라는지 손을 들어보라고 했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그랬는지 저는 참 속상했습니다. 그런데 제게 손을 든 사람이 제일 많았나 봅니다. 그래도 그는 안 된다고 하면서 그런 식으로 세 번을 다른 방법으로 투표했는데, 결과는 같았습니다. 결국 제가 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상을 주는 사람에게서 한 손으로 책을 받아 옆구리에 끼고는 그곳에서 나왔습니다. 상 받는 자세가 공손해야 하는데, ‘주려면 일찍 줄 것이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저렇게 계속해서 저울질 하다가 주느냐.’ 하는 생각에 아주 오만불손한 태도를 보인 것입니다.   그렇게 나오는데 문 앞에서 한 영국인을 만났습니다. 윌슨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제게 말을 걸었습니다.   “당신, 참 오늘 기쁘겠습니다.”   저는 처음에 그 사람이 저를 놀리는 줄 알았습니다.   “아까 보았잖아요. 뭐가 기뻐요?” “당신 예수 믿습니까?” “예. 나는 믿어요.” “언제부터 믿습니까?”   저는 “나면서부터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어머니가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교회를 다니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당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합니까?” “예. 사랑해요.” “언제부터?” “나면서부터.”   그러자 그는 한 가지 질문을 더 던졌습니다. “당신에게는 나면서부터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인격이 갖추어졌던가요?”   그때 ‘쾅’ 하고 마음에 무언가 부딪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질문에는 답을 하지 못하고, 나는 새벽기도도 다녔고 찬양대도 했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는 그것을 물은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저는, 외국인이 전쟁으로 가난을 겪고 있는 우리나라에 와서 한국 사람의 신앙을 자기 마음대로 평가한다는 생각이 들어, 남의 나라에 와서 왜 이 따위냐며 따졌습니다. 그랬더니 주변에 있던 젊은 신학생들이 와서 제 양팔을 잡으면서 외국인 손님에게 그러는 법이 아니라며 돌려 세우고는 집까지 같이 가자고 이끌었습니다. 저는 목을 돌리면서까지 불평을 하며 그 자리를 나왔습니다.   그렇게 집에 돌아와서는 그 성경을 펴 놓았습니다. ‘이왕 내 것이 되었으니.’ 하는 생각으로 창세기 1장을 펴 놓고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아까 그 사람은 나에 대해서 말하기를 계속 성경을 볼 사람이 아니라고 했지만 이 시간부터 평생을 볼 참이니 잘 봐 두십시오.’ 그 시간부터 평생 보겠다고 작정을 한 것입니다. 저는 상으로 성경책을 받은 그 날짜를 책에 적어 놓았습니다. 그날은 1962년 3월 17일이었습니다. 그렇게 기도해 놓고 창세기 1장 1절을 읽었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말씀에서 무언가 마음에 부딪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천지를 창조했다’는 것은 과학이나 인류학, 생물학 등 모든 것을 깡그리 무시해 버리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자라면서 이 세상은 우연히 만들어졌다고 배웠고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우연’에 의해 자연스럽게 되었다는 말이 타당성 있게 생각되어 그대로 인정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선생님이 우리의 조상을 따져 올라가면 원숭이라고 했을 때는 진짜 화가 나서 선생님 조상은 원숭이일지 몰라도 우리 할아버지들은 원숭이가 절대 아니라고 따진 적도 있습니다. 그렇게 도전한 적이 있기는 했습니다만, 창조를 인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에는 다른 이유가 없었습니다. 어떻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저는 계속 성경을 읽어나갔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창세기 1:2-3)   그쯤 읽어나가면서 ‘아, 그렇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했다고 기록된 내용을 과학으로나 어떤 변증법으로 설명할 수 있든 없든 그것은 상관없다. 문제는 나에게 있다. 혼돈하고 공허하다는 땅이 아니라, 첫째는 내가 문제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말씀에서부터, 성경과 제가 부딪쳐서 자꾸 오락가락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땅이 과학적으로나 자연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혼돈했든 공허했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내 마음에 어두움이 있었습니다.   그 어두움이 무엇으로 밝혀질 것인가 의문이 들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배웠던 글, 읽었던 책을 다 합해도 나에게는 ‘이것이다.’ 하는 만족이 없었습니다. 책을 읽어도 삶에 대한 확실한 답이 없었습니다.   내가 늘 바라던 참 빛을 찾음도그 일이 있기 몇 달 전의 일입니다. 1961년 12월의 마지막 밤에 저는 친구들과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부모님들께 허락을 받고 어느 친구 집에서 열댓 명의 친구들이 모였는데, 모여서 부르는 노래가 ‘케세라 세라 지난 시절은 옛날’ 하는 노래였습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니 노래가 나오고, ‘될 대로 되라.’ 하며 별별 소리를 하는 분위기 속에서 얼마나 침울했는지 모릅니다. 그때 저는 친구들에게 가지고 있던 바람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지낼 것이 아니다, 스무 살이 갓 넘었으니 앞으로의 십 년을 계획해 보자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무작정 세월을 보낼 것이 아니라 친구들 열댓 명이 모여서 작정만 잘 하면 십 년 후에 우리는 다른 사람으로 살고 있지 않겠나 생각했던 것입니다.     제 생각은 이러했지만 친구들에게 그날은 망년회를 하며 즐겁게 지내는 날이었습니다. 한 친구는 제 등에 술을 쏟아 부었습니다. 입으로 안 먹으면 등으로라도 마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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