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재 | 정치학 박사 (한국학 중앙 연구원 교수)
내가 구원받았던 이야기를 쓰려 하니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90:10) 라는 시편 구절이 먼저 떠오른다. 구원받은 이후 근 30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겪었던 이런 저런 일들도 생각난다.
하나님 앞에 초라한 몰골로 서 있던 내가 나의 죄는 이미 2천 년 전에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님의 보혈로 다 사해져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두 눈 가득히 잔잔하게 눈물이 고였던 일, 찬양이 울려퍼지는 속에서 침례 받던 일, 구원받은 이후 학교 다니며 교회를 멀리 했다가 기숙사에 들어갔던 일, 힘들었던 유학 시절 하와이의 형제자매들과 전도하던 일, 주변의 형제자매들에게 실망했지만 따지고 보면 나도 별 수 없는 존재임을 알게 되었던 일, 멕시코 전도 여행에 참여하여 하나님 말씀이 살아 있음을 목격했던 일,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지내는 동안 복음 전도사 스펄전이 활동했던 교회 건물 역시 십자가 장식도 없이 그저 ‘모임장소(meeting point)’라고만 불렸던 사실을 알고 반가웠던 일, 신앙생활은 계속해서 코 깨지는 것이지만 그래도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 23:5) 하며 기쁜 마음으로 생활을 다시 추스를 수 있었던 일들이 우선 마음에 스친다.
인간의 자유에 대한 회의감을 품고
1978년, 내가 구원받던 당시 나는 군 제대 후 복학하여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4학년생으로 공부하고 있었다.
군대에 가기 전, 나는 1973년 10월 2일의 유신 반대 시위에 가담하여 구속되었고 서대문구치소에서 약 50여 일 동안 수감되었을 뿐 아니라, 학교로부터도 완전히 제명당했었다. 당시 나는 “미래는 미친년 치맛자락처럼 갈기갈기 찢기고” 라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유성 온천 가까이에 있는 과수원집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1학년 중반까지 농사일을 거들며 지냈던 시골 무지렁이가 미련하게 공부하여 입시에 거뜬히 합격, ‘자랑스러운’ 서울대생이 되었으나 데모 한번 했다가 졸지에 철창에 들어앉았던 것이다.
대학교 1학년 때에 나는 교양과정부 반장 선거에 나가 서울 출신을 물리치고 반장에 당선되어 ‘신판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라는 연극도 주관했고, 여기저기 놀러 다니며 신나는 교양과정부 생활을 했다. 정치학과 2학년이 되어서는 과대표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미국문화원에서 복사해 온 타임이나 뉴스위크의 박정희 비판 기사를 돌려 보며 나라를 걱정하고 유신독재 타도를 외쳤었다. 당시의 용기와 기개로 보면 세상사가 다 내 마음대로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동대문경찰서 유치장에 갇히면서 담당 간수가 내 소지품을 하나씩 거두는 동안 그 당시 가장 소중하게 여기며 언제나 들고 다니던 70원짜리 삼성문화문고판 책을 속절없이 뺏기고 이에 저항하면서, 나는 ‘자유란 육신적인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자기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일을 할 수 있는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내가 이 세상에서 정말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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