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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2> 이스라엘 왕이 나셨네

2000년 12월 2일 / 2000년 12월 9일 복음서 강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태복음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예수의 탄생일, 또는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어릴 때도 교회에 다니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날은 크리스마스였습니다. 이 때가 되면 세계 곳곳에서 상당히 번잡하고 대단한 잔치가 벌어지는데, 저는 마태복음을 읽을 때마다 ‘예수 탄생일이 12월 25일은 아닐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짜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서 우리는 정확한 탄생일을 알지 못합니다. 다만 그 날을 정해서 기념할 따름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마태복음 1:1)
 
 
 
이 말 속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 ‘세계’라는 말씀을 영어 성경에서 보면, ‘책’(book)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통의 책이다’, 아주 멋있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통의 책’이라면 그 책의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인류의 주인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이것은 하나님의 책이다. 이것이야말로 전 인류에게 주어진 최고의 책인데,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창세기 5장 1절에도 이와 비슷한 구절이 있습니다.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는 말씀인데, 영어 성경에는 ‘아담의 계통의 책(the book of the generation)’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아담의 후손들이 죽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는 ‘예수의 책’이라고 되어 있고, 구약 성경에는 ‘아담의 책’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인류 역사가 얼마나 긴 세월 동안 흘러왔는지, 이 두 책의 흐름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족보를 따지기 전에, 또 창세기에 기록된 아담의 족보를 따지기 전에 먼저 생각해 보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성경 전반에 걸쳐 보면, 인간 육신의 겉모양으로 흐르고 있는 역사는 아담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육체를 탄생시키고 육체를 이어 준 사람으로서 ‘아담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그 인간 역사 속에 예수라는 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탄생함으로써 ‘예수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분이 모든 인류를 자기 이름 하에 예속시켜서, 고통과 처절한 괴로움과 외로움, 슬픔 등 모든 불행의 조건에서 행복의 조건으로 옮기시려고 이 책, 성경을 주셨습니다. 성경은 두 눈으로 읽기만 하면 딱딱하고 어려운 책이고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이 책은 아주 귀한 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큰 약속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하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자식이 없을 때 하나님께서 한 씨를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자손’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만, 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창 13:15) 고 그 씨가 받을 땅까지 약속해 놓았습니다. 유대 민족의 역사 속에 주어진 그 땅은 이 지구에서 가장 가치 있는 땅이라고 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현재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유브라데스 강에서부터 애굽 강까지 넓은 지역입니다. (창 15:18 참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인 유대인들에게는 그것이 약속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로부터 거의 4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원주민들과의 영토 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현재 우리나라의 강원도 정도 되는 땅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만, 구약 성경에 기록된 약속을 알기 때문에 ‘아, 천지를 지으신 창조자께서 이 지구를 만드셨을 뿐 아니라 이만한 땅을 우리에게 약속해 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일하는 종들도 많았고, 양 떼와 소 떼 등 기르는 가축들도 많았습니다. 그 집에서 길러지고 훈련된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창 14:14 참조)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늙고 그의 부인도 늙었지만, 자식이 생기지 않자 그들은 근심에 싸여 있었습니다. 대를 이을 아들이 없는 삶에서 바란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다메섹에서 데려온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생각한 그에게는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준 약속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이었습니다. (창 15:2-5 참조) 이 일들을 살펴볼 때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이 외로운 사람이었지만 그 배후에 하나님이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창세기 13:14-17)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이 약속은 참으로 귀하고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비록 아브라함과 같은 피를 나눈 형제 집안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스스로 자기 생활의 주도권을 잡고, 삶의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적인 요소가 있는 롯이 아브라함의 곁에 있을 때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롯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 12:1) 고 하신 지시를 따라 아브라함과 함께 고생을 하면서 먼 곳까지 왔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한 사람만을 지목하여 이 큰 축복의 약속을 하셨습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동서남북을 두루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마음속에 보이지 않는 십자가 하나가 그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의 씨
 
 
여기에서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네 자손’ 곧 ‘씨’에게 보이는 땅을 영원히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과연 이 씨가 누구이겠습니까? 아브라함과 사라가 낳은 이삭일까요? “영원히 이르리라” 그랬는데. 이삭의 아들 야곱일까요? 아닙니다.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하는 이 자손은 바로 마태복음 1장 1절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중한 것입니다. 언젠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전 인류의 통치자로서 세계를 통치하실 날이 올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읽을 때 약간만 잘못 생각하면 ‘이것이 어떻게 예수라는 한 씨를 가리키는 말이겠는가, 아브라함에게 수많은 자손이 있었는데’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현실에 부합하는 기독교인들이나 설교자들중에도 성경에 나오는 이런 약속들의 참뜻을 무시해 버리고 잘못된 해석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고전 2:14) 는 말을 했습니다. 참으로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이론에 빠지지 않도록 성경 말씀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 사도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수없이 많고, 자신 또한 틀림없이 아브라함의 씨요 아브라함의 후손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는 말씀의 뜻을 정확하게 지적해 주었습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갈라디아서 3:16)
 
 
 
사도 바울이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네 자손’이라는 말은 여럿을 가리키지 않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라고요? “그리스도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실 땅을 약속하실 때도 여러 사람을 가리키지 않았습니다. 구약에 정통한 바울 사도는 정확하게 한 사람,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지적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많은 후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왕이 된 사람들도 있었고, 왕족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시키기 위한 하나의 인간 모체가 되었을 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씨가 아니었습니다.
 
 
같은 아브라함의 후손이지만 곁길로 나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삭이 나기 전에 여종 하갈에게서 태어난 아들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씨였지만 제거되었습니다.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도 곁길로 나가고 씨에 대한 약속은 야곱에게로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가 형성되었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마태복음 1:1-6)
 
 
 
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보면, 아브라함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는 ‘왕’이라고 기록된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다윗 왕입니다. 이 계보 속에는 다윗 왕 이외에도 왕이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다른 왕들은 그냥 이름만 기록되어 있을 뿐 왕이라는 칭호는 적혀 있지 않습니다. 왕이라는 말은 다윗 한 사람에게만 붙여져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약속된 대로 다윗 왕의 왕권을 가지고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다윗 왕으로부터 긴 세월이 흐른 후에 이 위대한 한 왕이 이스라엘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크리스마스 때면 사람들은 “노엘 노엘 노엘 노엘 이스라엘 왕이 나셨네” (찬송가 123장) 하는 찬송가를 부릅니다. 이 지구상에 태어났던 모든 위인들, 모든 왕들이 어느 날 이 만왕의 왕 앞에 잘잘못을 막론하고 굴복할 때가 올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왕권을 먼저 얻었던 다윗은 영원한 왕의 위(位)를 약속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사무엘하 7:12-13)
 
 
어쩌면 다윗 왕은 ‘네 몸에서 날 자식’이 솔로몬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는 이런 영원한 약속을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 민족은 솔로몬 왕 다음 대에 벌써 흐트러지기 시작해서 남쪽 유대와 북쪽 이스라엘의 두 나라로 갈라졌습니다. 그런 중에도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을 계속 이행하고 계셨고, 그 완전한 왕, 영원한 왕이 탄생하시기까지 인간적인 대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
 
 
아브라함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어지고 살아갔습니다만, 가장 중요한 약속의 씨는 심겨질 자리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이 지구, 전체 땅 중에서 어느 한 땅이었습니다. 그 땅은 먼 옛날,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던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신 땅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방의 땅을 떠나 먼 길을 와서 도착한 땅, 아직은 그 땅의 주권도 가지지 못한 그에게 그 땅 전체를 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먼저 그 땅에 떨어졌고, 아브라함이 그 약속을 받았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 씨가 날 것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그 씨는 선지자 미가가 예언했던 대로 유대 땅 베들레헴에 탄생했습니다.
 
 
이 일이 보통 일이었습니까?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다 간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아들 예수처럼 태어나지는 않았습니다. 누구도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그러한 약속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탄생할 장소까지 하나님께서 미리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아브라함이 인간적으로는 아담의 후손, 육신이 이어지는 인간 대열 속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4-5절 는 말을 시작으로 해서 그의 후손들이 계속 몇 세를 향수하고 살다가 죽었다는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데려가신 에녹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었습니다. 어떤 노래를 들어보면, ‘한 오백 년 살자는데’ 하는 가사도 있습니다만, 이때 이들은 적어도 거의 천 년에 가까운 세월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모두 죽었습니다. 육체는 그렇게 죽는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그의 후손들이 모두 죽게 되었지만,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요 6:63) 하신 말씀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이 세상에 오셔서 오래 오래 살다 늙어서 죽을 분이 아니었고, 이미 오시기 전에 어떻게 죽으실 것까지 예정되었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오셨다가 그 뜻을 따라 부활하신 후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이전에 그의 탄생과 죽으심까지 그에 관한 많은 일들이 상세하게 구약에 기록된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미가서에는 한 다스릴 자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는 예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약 300년 후에 선지자 말라기는 그리스도에 앞서 오는 한 선지자에 대한 약속을 기록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의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하되 금은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말라기 3:1-3)
 
 
 
이 말씀이 기록된 때는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전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 그 대단하신 분이 임하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사자를 보낸다는 약속이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 탄생 이전에 사람들의 교만하고 불손한 마음을 낮춰주고 정리하기 위해 나타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의 자세를 갖추게 하기 위해 이스라엘 땅에 태어났습니다.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이 말씀을 하신 분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 사자, 일 맡은 사람, 즉 심부름꾼을 보내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가 먼저 와서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예비한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많은 유대인들이 현실에 매여 살 때에 그들의 마음을 낮추어 회개의 침례를 주었던 선지자였습니다. “내 앞에서” 라는 말씀에서 ‘내’는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쓰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뒷구절을 읽어봅시다.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殿)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이분이 바로 이스라엘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새 언약을 약속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말라기 3장 1절을 잘 살펴보면, 보냄을 받은 사자가 있고 임하시는 사자가 있습니다. 보냄을 받은 사람은 세례 요한이고 임하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마태복음 1장을 읽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전에 있었던 사건들을 조금씩 발견하게 됩니다.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그 긴 세월 속에 아브라함에게 약속되었고 다윗에게 약속된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이 그리스도가 세상에 탄생하시기 전에 준비하러 오는 사람이 예언되어 있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는 빼놓지 못할 많은 선지자들이 있어서 예언의 말씀을 계속 남겨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거의 같은 나이에 예수님과 같은 시대에 나타나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사람은 바로 세례 요한뿐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는 선지자입니다. 이런 점을 알고서 성경을 읽으면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 5:39) 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날 것입니다. 그래서 말라기의 예언대로 세례 요한은 태어났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요한복음 1:6)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요한입니다.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요한복음 1:7-8)
 
 
 
여기에서 빛은 누구입니까? 참빛이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었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참빛이 사람들의 마음에 비취도록 하기 위해서 온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이 세례 요한에게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찾아와 “네가 누구냐” 하고 물었을 때, 그는 간단하게 답했습니다. (요 1:19-27참조)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요한복음 1:23)
 
 
 
사람들은 자신이 왜 이세상에 태어났는지, 왜 사는지, 자기 인생길이 어떤 길인지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술만 마시면 ‘오늘도 걷는다마는’ 하고 노래를 부르는데, 자신이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는 모릅니다. 모두 죽고 마는 그 인생길에 세례 요한이 먼저 와서 주의 길을 예비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낮추고 준비시킨 후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도록 한 것입니다. 그 세례 요한이 “나는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고 자기 위치를 밝혔습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이사야 40:3-5)
 
 
 
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예비하고, 인간의 마음을 평탄하게 만드는 작업을 하려고 세례 요한이 먼저 왔습니다. 신약 성경 여러 곳을 읽어보면, 당시 유대인들의 마음에 어떤 동요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분명하게 말을 하니까 ‘이 사람이 혹시 그리스도는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지 참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사람으로서 예수님보다 먼저 태어나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이 말씀이 누구를 향해 하신 것인지 주의 깊게 생각해 보고 넘어가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그러면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어떤 분이셨는가를 살펴봅시다. 구약 성경을 보면 ‘창조자가 있었다’ 라고 합니다. 잠언에는 어떤 한 겸손한 사람이 자신은 짐승보다 못하다고 하면서 한 가지 아는 것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 한 가지 사실을 아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 이름이 무엇인지,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잠언 30:2-4)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즉 온 우주를 창설하신 창조자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이후 2천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보면,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고 있지만, 잠언 기자가 이 말을 하던 당시만 해도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느냐’ 하는 말은 굉장히 심각한 말이었습니다. 이 시절에 감히 누가 창조자의 아들이 누구라는 것을 알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탄생 천 년 전에 미리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시 2:7) 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아들은 원래 창조자로 계셨던 분이셨고 지혜의 근본이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산이 세우심을 입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으로 해면을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있게 하시며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로 명령을 거스리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시는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었느니라” (잠언 8:22-30)
 
 
 
이 말씀을 보면, 우리는 예수님이 창조자가 되어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탄생하신 것은 종의 형체와 같이 되어 오신 것이었습니다. (빌 2:7참조)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한 민족을 택하셔서 그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 계속 그 약속을 말씀해 오셨습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벧전 1:10-11) 한 사도 베드로의 말을 생각해 봅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잠언에서 말하는 ‘지혜’로서 하나님의 아들의 속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초라한 모습으로 오신 위대한 창조자
 
 
우리는 겉모양을 보고 사람을 판단하고 따지고 평가하기를 좋아합니다.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도 남의 관상을 보고 판단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못생기고 체격이 조그마해도 덩치 크고 잘 생긴 사람보다 속이 넓고 큰 사람들이 있습니다. 크고 우람하고 잘생겼어도 속이 좁아 비틀어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세상은 사람의 겉모양을 가지고 따지기 좋아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겉모습보다는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속사람은 사람의 겉모양과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750년 전에 한 선지자는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53:2) 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사 53:3) 마치 사람에게 버림받은 자, 형편없는 취급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했다” (사 52:14) 라는 말씀도 했습니다. 이러한 형편없는 모습으로 끝을 맺을 한 인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1) 하신 말씀처럼 그는 근본 창조자이셨습니다. 그가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실 때에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서 그의 말씀이 여러 부분으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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