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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 사람 사랑하심을 다 보여 준 십자가의 죽음

요한복음 19장 17-30절 1998. 2. 14 강연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예수의 못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 것을 썼다 하니라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이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요한복음 19:17-30)       예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시고     기독교를 믿는 사람뿐 아니라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사실은 대부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을 그런 보편화된 이야기로만 끝낼 것이 아니라 이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깊이 생각해 보고, 또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는지를 새겨 보았으면 합니다.     이 요한복음 19장 17절부터 30절까지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아주 짤막한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 내용은 사도 요한이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던 곳 가까이에서 목격한, 정확한 기록입니다. 마태와 마가와 누가, 그 세 사람도 역시 예수께서 돌아가시던 날에 대해서 기록했는데, 그 기록을 보면 아마도 그들 셋은 요한보다는 예수께서 달리신 십자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기록한 복음서에는 사도 요한과 다른 관점에서 기록한 내용도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잘못 기록했다거나 불충분하게 기록했다고 여길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벧후 1:20-21) 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살아 계실 때에,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요 16:7, 13),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 14:26)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떠나신 후에 그 말씀대로 성령이 직접 사도들에게 임하셔서 신약 성경을 기록하게 했기 때문에 이들의 기록 가운데 오점이 생길 수는 없습니다.     다만 2천 년 동안 기독교 역사가 흘러오는 가운데, 맨 처음의 원본을 두고 그것을 옮겨 쓰고, 다른 나라 말로 번역하고, 번역한 것을 다시 번역하는 과정이 이어지면서 성경 가운데 혹 빠진 구절이 생기거나 단어가 잘못 기록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그 몇 단어들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성경의 말씀들이 서로를 보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요한복음에 대해서, 사도 요한이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보았던 장면 중에 기억나는 것만을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요한은 함축적으로 예수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다른 제자들보다 영적인 문제를 더 깊이 다루고 있습니다.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요한복음 19:17)       여기서 예수께서 지신 ‘자기의 십자가’는, 가르침을 시작하신 때부터 십자가에 못박혀서 운명할 때까지의 삼 년 동안 겪으신 모든 고난과 고통을 가리키는 십자가이지, 골고다 언덕까지 몇 백 미터 지고 가는 그 나무 십자가만을 뜻하는 말은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고 비틀거리면서 걸어가는 그 고난이 예수 고난의 전부는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창세 이후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 왔습니다. 그 제사의 제물로 바쳐진 어린 양과 소와 염소와 비둘기의 그 모든 죽음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픔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나무로 만든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 겪으신 그 고난에 대해서 우리가 동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2:2)       십자가 너머에 있는 즐거움,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가 만들어지는 일을 위해서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참으셨고 온갖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옆에서 예수님의 고난을 지켜본 사람들이 그분을 동정했고, 또 구레네 사람 시몬*이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갔다고 해서 그들이 예수님의 고난을 덜어드린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길을 제자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울면서 따라갔지만, 그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일을 거들어 줄 만한 용기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힘이 다 빠져 버린 그들이 무엇을 거들 수 있겠습니까? 구레네 사람 시몬만 억지로 로마 군병들에게 잡혀 십자가를 지고 갔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곳은 히브리 말로 골고다, 해골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죽음의 곳이라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섬뜩한 곳에서 못박히셨습니다. 그러나 오직 죽음만 있던 그곳은 예수께서 죽으심으로써 새로운 생명이 싹을 내는 새 삶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요한복음 19:18)       두 사람이 예수님의 왼쪽과 오른쪽에 못박혔습니다. 그리고 그중 한 사람은 그날 이 골고다에서 인류 역사상 어떤 위대한 인물도 얻지 못한 영광을 받았습니다. 인간의 눈에는 비참하게 보였겠지만, 예수의 그 영광스런 십자가 옆에 달렸던 한 강도는 그 죽음의 자리에서 어떤 사람도 그에게 주지 못했던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이 죽음이 세상 어떤 인간의 죽음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하고 고귀한 죽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죽음의 이면에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복음서에는 이 고통스러운 장면이 낱낱이 설명되었습니다.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요한복음 19:19)       사도 요한은 예수의 죄패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기록되었다고 정확하게 말했습니다.       예수의 못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요한복음 19:20)       이 죄패는 유대인의 말과 또 로마인의 말과 헬라인의 말로 적혀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요한복음 19:21)       유대인들은 자존심이 강했던가 봅니다. 자기들의 왕을 자기들이 잡아 죽이는 형국이 되는 것을 면하기 위해서, 그들은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달라고 빌라도에게 요구했습니다. 또한 유대의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요구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 것을 썼다 하니라  (요한복음 19:22)       그러나 빌라도는 “나의 쓸 것을 썼다”고 말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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