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지역 성경탐구모임 2001년 4월 14일 오후
가장 귀하게 생각하는 것
미국의 대전도자 빌리 그레함과 함께 일했던 사람들 중에 조지 베브리 쉬아(George B. Shea)라는 음악가가 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들은 천주교인이거나 기독교인으로,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는데 어느 대통령 앞에서 그가 한 찬송가를 부른 일이 있습니다. 그때 그 찬송가는 상당히 제 마음을 끌었습니다. 그 곡은 당시 한국 찬송가 책에는 없는 곡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천주교인들이 그 찬송가를 부르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시 150:6) 라고 했고, 인간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입을 가지고 태어났으니 교파나 교단을 초월해서 하나님을 열심히 찬양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도 했습니다.
천주교인이든, 기독교인이든 함께 그 찬송가를 불러봅시다. 내용이 상당히 좋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이전에 즐기던 세상 일도주 사랑하는 맘 뺏지 못해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유혹과 핍박이 몰려와도주 섬기는 내 맘 변치 못해
<후렴>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예수밖에는 없네 찬송가 102장
이 찬송가를 들으면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나이 열일곱, 열여덟 시절에 자칭 문학가 아니었던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저도 그쪽에 관심을 두고 한번씩 글을 써보기도 했고 문학책이나 시집 등을 읽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시절 읽었던 책들 중에는 저를 괴롭히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하나는 한국 시인 소월 김정식이 쓴 시로, 그 시의 한 대목에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하는 시구가 있었습니다.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중에 어떤 이름이 나를 가장 강하게 붙잡아 줄 수 있습니까. 자기 이름입니까? 부모님 이름입니까? 형제 또는 친구의 이름입니까? 인류 역사상 제일 많이 불리고 제일 위대하게 불린 이름은 아마 예수의 이름일 것입니다. 시저나 나폴레옹, 히틀러와 같은 이름을 다 대보아도, 그 이름들은 한때 잠깐 안개처럼 나타났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마 인류 역사 마지막 때까지 그 이름은 위대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세상을 살면서 자신이 가장 귀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가장 귀하게 생각하는 것. 그 시인의 시 속에는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그 이름이 도대체 어떤 이름이기에? 아마 너무 그리워서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귀한 이름이 있다면 이 찬송가 가사에 나오듯 바로 예수라는 그 이름입니다. 만약 인간의 역사 속에 예수라는 분이 다녀가시지 않았다면, 인간의 역사는 무엇과 같을까. 꽃으로 말하면, 모양은 다 갖춰져 있고 향기가 날 수도 있지만 생명이 없는 조화(造花)와 같을 것입니다. 외모가 아무리 잘 생기고, 좋은 옷을 입었다 하더라도 그 속에 영혼이 없으면 무엇입니까? 시체 아닙니까?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이 생명을 주장하는 이름이 바로 예수입니다. 생명. 그 생명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을 종종 생각해 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 8:36) 사람이 천하를 다 얻었다 해도 목숨이 떠나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톨스토이의 소설 속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러시아의 어느 부자가, 자기의 넓은 땅에 와서 아침부터 선을 그어 해지기 전까지 출발한 지점에 도착한 사람에게 선을 그은 땅 전부를 공짜로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중 어떤 사람이 가서 아침부터 열심히 뛰었습니다. 얼마나 땅이 원이었겠습니까. 자기 농토를 만들기 위해서 선을 그어 가면서 열심히 뛰는데 그러다 보니 목은 타오는데 해는 벌써 중천에 떠 버렸습니다. 그래서 되돌아가려는데 더 얻을 수 있는 땅이 아까워서, 저녁때까지만 뛰자며 계속 뛰었습니다. 선만 그어 놓으면 전부 자기 것이 된다고 했으니, 직선으로 계속 가다가 옆으로 조금 뛰고 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와서 해 지기 전에 겨우 그 주인 앞에 도착했습니다.
“이만큼 뛰었습니다. 약속대로 이 땅은 이제 제 것이지요?”
“그렇소. 당신에게 주겠소.”
꿈에도 그리던 땅을 갖게 되어 벅차고, 좋았지만 이 사람은 목이 타고 숨이 가빠 결국 좋아하던 중에 죽어 버렸습니다. 심장이 멎은 것입니다. 그 땅 주인이 말합니다.
“시체는 이 땅에 거름으로 묻어라.”
결국 그가 가져간 것은 길게 뻗은, 한 평 조금 더 될 정도의 땅이었습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 사람은 그렇게 묻혀 버렸으니, 그 땅 얻은 것이 자기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만일 이 사람이 성경을 통해 자기 영혼이 잃어진 상태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것을 회복시키는 일이 자신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알았을 것입니다.
참된 것과 그림자
사람들은 막연하게 생을 보냅니다. 부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배운 사람이나 배우지 못한 사람이나,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지위가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삶에 지쳐 있습니다. 부지런하게만 살다 보니 정작 진짜 찾아야 될 것은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잘못하면 사람에 대한 가치 판단 기준을 너무 외형에만 둘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사는 집은 어떻다, 어느 학교 출신이다, 공부는 어디까지 했다, 재산은 얼마다, 직업이 무엇이다 하는 것들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에게 계속 질문을 하다 보면, 그중에는 참된 행복을 찾으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돈이나 명예, 어떤 애정 관계 속에서도 참 것을 찾지는 못합니다. 행복의 기준이라는 것은 마치 그림자와 같은 것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붙잡고 진짜인 줄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어릴 때의 일입니다. 동네 아이들과 놀고 있었는데 어떤 청년이 와서 호주머니에서 손거울을 하나 꺼내더니 햇빛에 비추었습니다. 그러니까 거울에 반사된 빛이 어느 건물 벽에 부딪쳤습니다. 아이들은 거기에 반사된 빛을 보고 좋아했습니다. 이 청년은 누구든지 저 건물 벽에 부딪친 빛을 잡기만 하면 거울을 선물로 주겠다고 했습니다. 철없는 꼬마들은 벽으로 가서 빛을 잡으려는데, 빛이 자꾸 움직이니까 아이들끼리 서로 머리도 부딪치고 난리가 납니다. 청년은 꼬마들의 그 모습이 재미있어서 계속 거울을 요리조리 움직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 중에 조금 나이 든 아이가 거울을 덥석 잡아 버렸습니다. 결국 청년은 그렇게 손거울을 뺏겨 버렸습니다.
그처럼 사람들은 진짜 것을 두고 반사된 것을 좋아합니다. 그것이 전부인 줄 압니다. 우리 인간은 이 땅 위의 행복을 추구하며 삽니다. 많은 의문 속에서 태어난 우리는 무언가 찾으며 자랍니다. 우리 인생은 그렇게 의문의 연속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메우기 위해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눅 16:11)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 속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보이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그 자체일 뿐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 눈에 보이는 모습은 점점 시들어 갑니다.
가을이 되면, 푸르렀던 나뭇잎은 노랗게 변해서 마른 잎이 되어 떨어집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은 즐거워서 웃기도 하고 찡그리기도 하며 세월이 흐르는 가운데 나빠진 시력 때문에 안경을 쓰기도 하고 주름도 생깁니다. 어느 새 백발이 지름길로 왔다는 이야기가 있듯이, 그렇게 살면서 사람은 서서히 늙어갑니다. 그러다 결국 해골이 됩니다.
이 해골은 우리가 세수를 할 때마다 늘 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만져지는 것이 사람이라는 존재의 전부입니까? 아닙니다. 사람 속에는 속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이 육신은 몸, 영어로 ‘body’라고 합니다. 이 몸에는 뼈와 살, 그리고 피가 있습니다. 그 속에는 혼이 있고 영이 있습니다. 합해서 영혼이라고 하고 몸과 혼과 영을 모두 합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영혼. 사람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이 영은 영어로 ‘spirit’입니다. 그리고 영과 혼이 합쳐져서 사람의 생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신은 부모님의 장단점을 그대로 복사해서 태어납니다. 혈액형도 섞여서 만들어집니다. 부모님의 영향을 받고 태어난 몸은, 부모님이 먹고 살았던 음식을 그대로 섭취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렇게 몸을 형성시키는 것입니다. 혼은 생각이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악을 좋아하거나 문학 또는 철학과 같은 것을 좋아하기도 하는 혼은, 그렇게 스승을 맞이해서 배웁니다. 스승을 통해 받아들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귀한 것은 영입니다. 인간에게는 종교 심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동물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spirit’라고 하는 이 영 속에 ‘Holy Spirit’라는 성령, 곧 하나님의 영이 임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자연 조건에 맞추어서 살고, 자연 조건에 맞추어서 배우고 있는 몸이나 혼과는 달리 영은 영원에 속해 있습니다. 영원에 속해 있는 이 영에, 영원한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들어가야 비로소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로마서 8:16)
성령이 친히 오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 속죄함을 입은 후 성신이 오셔서천부의 아들 된 것을 곧 증거하시네 (합동찬송가 437장)
얼마나 좋은 찬송가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부모를 찾습니다. 자기를 가르쳐 준 스승을 찾습니다. 그리고 이 영을 인도하는 인도자, 주님을 만납니다. 그 성령이 우리 안에 받아들여졌을 때,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십니다. 영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이것을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성경 말씀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세상 모든 만물은 빛을 따르고, 길을 찾고 있습니다. 아무 말도 못하는 나무는 어떻습니까? 실제로 나무도 빛을 따라갑니다. 봄부터 나무를 유심히 관찰해 보십시오. 햇빛이 비취는 곳을 향해 가지들이 뻗어나갑니다. 해바라기는 아침에 꽃잎을 활짝 열고 해의 움직임을 따라갑니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면 고개를 숙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도 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몸으로 추구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생각으로 인해 배움에서 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보다 더 깊이 들어가면 영이 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언젠가 우리 영에게 확답이 주어졌을 때,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찬송가 40장)
하는 찬송가의 가사처럼 영혼이 주를 찬양합니다. 그 힘이 자기 속에 주어집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이 자기 속에 왔기 때문에 길을 찾게 되었다, 알았다 하는 답입니다. 확답입니다.
그런데 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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