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강해 중에서 2006년 4월 15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물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 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별히 가이사 집 사람 중 몇이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빌립보서 4:10-23)
우리는 이 말씀을 읽고 초대 교회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형편과 생각들을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것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된 책은 성경일 것입니다. 한 권의 책 이름으로 가장 많이 인쇄된 책도 아마 성경일 것입니다. 세상에는 성경의 위대함을 가릴 만한 그 어떤 책도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성경만큼 단순한 내용의 책이 없는 것 같지만, 그만큼 복잡한 책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성경이 주장하는 것 속에는 일반인들의 생각이 섞이거나 그 생각과 타협하려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성경 자체가 답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학 공식을 배우지 않은 사람이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 수 없듯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근본 의도를 알지 못한 채 성경을 대하면 쉬운 것 같은 말씀도 도무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특히 이 빌립보서 4장 10절 후반부터의 내용은 꼭 있어야 될 내용이지만, 이 내용 그대로를 설명하기는 망설여집니다. 이 글은 상당히 독선적인, 양보 없는 태도로 쓴 글입니다. 얼마나 도도한 자세입니까?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그 우상 앞에 제사를 드립니다. 그 우상들은 사람들에게 어떤 답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런 우상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해왔고, 인류의 역사를 이어왔습니다. 사람들은 어떤 종교에 심취해서 그 종교가 만든 우상에게 무엇인가를 바쳐왔습니다.
이런 찬송가를 생각해 봅시다.
주의 사랑으로 죄인 괴수까지그 구원을 얻어 매일 보호받고성신을 모시고 주를 따라가니사랑의 불길이 내 맘에 일도다
십자가를 보고 지금 모든 것을주의 제단 위에 온전히 바치네주께서 그 값을 이미 주셨으니받으신 제물은 그 불에 타겠네
구원을 얻음은 주 은혜뿐일세지금은 자녀로 두려움 없도다할렐루야로써 찬송을 부르세사랑의 불길이 내 맘에 일도다
(후렴)주께서 보내신 사랑의 불길이사랑의 불길이 내 맘에 일도다성신이 오셨네 영광을 돌리세사랑의 불길이 내 맘에 일도다 (합동찬송가 403장)
이 찬송가를 보면 생각나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모든 것을 주의 제단에 온전히 바치네. 그 제물이 그 불에 타고 주께서 보내 주신 성령이 내 마음에 일어난다.’ 성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은 도저히 알 수 없겠지만, 성경을 조금이라도 읽고 아는 사람들은 어렴풋이나마 ‘아, 중요한 내용이구나. 그 속에 나도 포함되는구나.’ 하는 것을 알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을 자세히 보면 이 찬송가 가사에 들어 있는 내용이 나오는데,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18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참 이상한 말 아닙니까? 전쟁 때나 사용될 만한 암호 같은 글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과 이 편지를 받는 빌립보 교회 사이의 끈끈한 사랑은 이 글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하다’고 한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내용을 창세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조상 아담이 범죄하여 에덴에서 쫓겨난 이후 낳은 자녀들 중에 두 사람이 하나님께 제물을 바쳤습니다. 형 가인은 땀 흘리고 수고하여 거둔 농산물, 그가 먹을 수 있는 곡물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시고 동생 아벨이 바친 양은 열납하셨습니다. (창 4:1-5 참조) 성경에는 그로부터 인류의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제사와 제물, 제단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한번은 엄청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사건은 조용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어떤 노인에게 아들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가 애지중지 키우던 그 아들을 제단에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노인은 아들을 제물로 바치러 갔습니다.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기 위해서 일단 아들을 묶고, 제단 위에 불붙이기 전에 아들의 목숨을 끊어야 했습니다. 노인이 칼을 들어 아들을 죽이려는 순간 하나님께서 그 일을 중지시키셨습니다. 근처 수풀에는 숫양 한 마리가 걸려 있었고, 아들 대신 그 양이 죽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초기에, 이스라엘이 국가로 형성되기 이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도 성경에는 하나님께 제물 드리는 방법을 그 노인,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설명하기 위한 다른 여러 이야기들이, 무언가를 암시하듯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어머니의 솜씨 좋은 음식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는 쌍둥이 아들이 있었는데 에서와 야곱입니다. 건장한 형 에서는 들에서 뛰어다니며 사냥하기를 좋아한 반면, 동생 야곱은 아주 얌전했습니다. 야곱은 집에 틀어박혀 어머니에게는 잘 보였지만, 사내답지는 못했습니다. 이삭이 나이 들어 눈이 어두워져 잘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그는 자기 생애를 마치기 전에 축복을 주려고 맏아들을 불렀습니다.
“나를 위해서 별미를 만들어 갖다 바쳐라. 내가 그것을 먹고 네게 축복의 기도를 해주겠다.”
에서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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