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가 주신 평화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 진다고 설워 마라명춘삼월 돌아오면 너는 다시 피련마는 가련하다 우리 인생 한 번 가고 아니 온다
저는 어렸을 때 이 시를 읽고 마음이 참 허전했습니다. 명사십리라는 유명한 해변에 해당화가 피었다가 지는데, 내년 봄이 되면 다시 꽃이 피니까 슬퍼하지 말라고 하면서 우리 인생은 한번 가면 다시 오지 않는다고 하니 얼마나 비교가 됩니까. 마음이 아주 좋지 않았습니다. 왜 사람은 한 번 가면 그만인 걸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스무 살이 갓 넘었을 때 어떤 시를 읽었는데, 저는 그 시인이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생활이 즐거운 노래처럼 흘러만 간다면 행복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으랴만 온갖 일 얽히고 답답한 중에도 얼굴에 미소 띄울 수 있다면 더욱 보람 있는 생이라 하리니
참 이해할 수 없는 시였습니다. 온갖 일들이 얽히고 답답한데도 어떻게 미소를 띄울 수 있을까.
그런데 어느 날 이후 그 말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비슷한 마음가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복잡한 도시의 길 한복판을 지나가면서 마음속으로 찬송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평안함 내 맘에 받은 뒤에슬픈 마음 간 데 없고 온 세상은 구주를 찬양하는 듯아 영광의 주님 예수 (합동찬송가 417장)
이 평화를 내 마음에 받은 뒤에는 모든 슬픔의 시절이 지나갔다. 참 얼마나 자유롭고 평안합니까. 이와 같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순진한 어린아이가 제 부모를 믿고 의지하기에 울다가도 ‘엄마’ 또는 ‘아빠’ 소리만 들어도 울음을 그치듯이, ‘믿는다’는 말을 사용할 줄 몰라도 자연스럽게 믿고 의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의지할 곳이 없지만, 계절이 지나고 봄기운이 지나가면 온 들에 가냘프고 연약한 새싹들이 파릇파릇 돋아나듯이 우리 마음에도 어떤 힘이 작용할 수 있도록 성경에 약속되어 있습니다.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들은 종교적 행위로써 여러 모양의 신을 만들고 그 앞에서 제사를 지냅니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다른,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1) 는 말씀처럼 성경이 말하는 바는 사람들이 믿는 바와 다릅니다.
우리는 현재 보이지 않는 것을 무시할 수 없는 때에 살고 있습니다. 전파를 생각해 봅시다. 카메라로 어떤 영상을 찍은 것을 때에 따라 TV화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카메라로 찍은 영상이 전파를 통해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이 전파는 우리 눈으로 직접 볼 수 없지만, 매개체를 가져다 놓으면 화면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서 나름대로 상상하기 쉽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다른 종교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살다가 생을 마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읽어가면서 성경을 전했던 사람들의 주장을 알아가는 것도 필요합니다. 사도행전 17장 16절부터 읽어봅시다.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아덴’ 이라는 곳은 현재의 아테네입니다. 아테네는 고대 그리스 문명 이야기 속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도시이지요. 이 글은 바울이 아테네를 지나다 아테네 사람들과 직접 나누었던 이야기로, 바울을 따라다니던 ‘누가’라는 의사가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이 일었습니다. 아테네는 지금도 많은 신전과 멋있는 석상, 큰 기둥들이 즐비합니다. 그 당시 온 성에 우상이 가득했을 상황을 알 수 있겠지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신을 믿기보다는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더 나았기 때문에 여러 석상과 신전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곤 했습니다. 모든 인간의 섬김의 대상이신 유일한 하나님 앞에 경의를 표할 줄 모르고 사람이 직접 만들고 다듬은 우상에 절하는 사람들을 보고 바울은 화가 났습니다.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혹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사도행전 17:17-18)
바울이 날마다 회당과 장터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합니다. 바울과 같이 변론을 했던 사람들 중에는 에피쿠로스 철학자들과 스토아 철학자들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사람이 죽으면 완전히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사람은 다시 부활한다’는 희망적인 논리를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죽어서 썩으면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바울은 천지와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고, 인간의 마지막 회복도 있다는 내용을 전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역사를 이어오며 갖고 있었던 부활의 논리이며, 바울도 구약 성경을 기초로 이러한 주장을 전개했습니다. 바울은 부활에 대한 이론을 지니고 있고,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이런 진리를 설명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붙들어 가지고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의 말하는 이 새 교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느냐 네가 무슨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 되는 것을 말하고 듣는 이 외에 달리는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사도행전 17:19-21)
사람들이 바울을 붙잡아 ‘아레오바고’라는 곳에 끌고 가면서 바울이 말하는 새 교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바울이 너무 새로운 것을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아테네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등 이 지구상에 현존하는 철학의 기초를 세운 사람들을 배출한 도시입니다. 아테네는 당시의 모든 정치, 뉴스, 철학의 중심이 되는 대도시였고 모든 이론과 사상을 주제로 항상 토론이 전개되는 곳이었습니다. 학식이 있는 사람들도 많이 모였습니다. 이 아테네 사람들은 가장 새로운 뉴스거리에 관심을 갖고 지낼 때였습니다. 22절,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아테네 사람들이 ‘네가 전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바울에게 질문하니까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바울은 원래 유대인의 피를 이어받았으나 로마가 지배하던 소아시아 길리기아라는 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고 학자였습니다. 그런 바울이 아테네 사람들에게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라고 말했습니다. 23절,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당시 아테네 사람들은 이런 저런 갖가지 신의 조각상이나 신전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예를 갖추어 제사를 지냈고, 혹시나 빠진 신이 있을까봐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까지 세웠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아네테 사람들에게 범사에 종교성이 많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한 술 더 떠서 이들에게 알지 못하는 그 신을 알게 해주겠다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24절,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지금도 각 나라의 교회마다 예배당을 지어 놓고 그것을 성전이라 가르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전은 이 지구상에서 오직 예루살렘에 하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께서는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않는다는 말씀을 통해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렘 7:4) 하는 말씀까지 겸하여 전하고 있습니다. 유대인 아닌 이방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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