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회 국내·외 성경탐구모임 2005년 8월 5일 저녁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 그러나 죄인은 그 도에 거쳐 넘어지리라 (호세아 14:9)
거룩한 성
나 어젯밤에 잘 때 한 꿈을 꾸었네 그 옛날 예루살렘 성의 곁에 섰더니허다한 아이들이 그 묘한 소리로 주 찬미하는 소리 참 청아하도다천군과 천사들이 화답함과 같이예루살렘 예루살렘 그 거룩한 성아 호산나 노래하자 호산나 부르자
그 꿈이 다시 변하여 그 길은 고요코 호산나 찬미 소리 들리지 않는다햇빛은 아주 어둡고 그 광경 참담해 이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때의 일이라이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때의 일이라예루살렘 예루살렘 그 거룩한 성아 호산나 노래하자 호산나 부르자
그 꿈이 다시 변하여 이 세상 다 가고 그 땅을 내가 보니 그 유리 바다와그 후에 환한 영광이 다 창에 비치니 그 성에 들어가는 자 참 영광이로다밤이나 낮이 없으니 그 영광뿐이라 그 영광 예루살렘 성 영원한 곳이라이 영광 예루살렘 성 참 빛난 곳일세예루살렘 예루살렘 그 거룩한 성아 호산나 호산나 호산나 노래 부르자호산나 노래하자 호산나 호산나 (새찬송가 654장)
땅에 있는 예루살렘과 위에 있는 예루살렘
예루살렘에 대한 내용인데, 참 좋은 찬송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노래를 합창곡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예루살렘이 어떤 곳인지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예루살렘은 다윗 왕이 통치하던 때부터 유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성지이자 정치적 수도로서, 유대인과 회교도들 사이에 상당히 많은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소리 높여 찬송하는 예루살렘은 과연 어떤 예루살렘일까요? 신구약 성경을 전체적으로 읽어 보면, 현재 이스라엘 땅에 있는 예루살렘 외에, “위에 있는 예루살렘” (갈 4:26), “새 예루살렘” (계 21:2) 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천문대에서 그곳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천문학자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해서 찾을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이 예루살렘은 지상에 있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영원히 정착시키실 거룩한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 성경은 이 위대한 예루살렘이 따로 존재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새 예루살렘 복된 집 네 이름 높도다이 수고 언제 그치고 나 거기 가리까
저 보석으로 세운 성 늘 보고 싶도다그 진주 문과 황금 길 나 언제 보리까
그 사도들과 성도들 주 예수 모셨네주 예수 믿는 친구들 쉬 함께 모이세
새 예루살렘 복된 집 나 언제 가리까나 언제 수고 그치고 그 영광 누릴까 (찬송가 225장)
우리가 노래하는 예루살렘은 이 땅 위의 예루살렘이 아닙니다. 현재 이스라엘 땅에 있는 예루살렘은 유대인의 소망의 장소입니다. 전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아주 중요한 곳일 뿐 아니라 유대인과 등 돌리고 사는 회교도들에게도 소망의 장소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사모할 것입니다. 이 차이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요한계시록 21:1-4)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하늘의 예루살렘에 소망을 두어야 하는데, 사람들은 자꾸 육신적인 것을 따지다 보니까 눈으로 볼 수 있고 갈 수 있는 예루살렘, 곧 땅에 있는 예루살렘에만 소망을 둡니다. 그래서 중세에는 십자군 전쟁과 같은 끔찍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전쟁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곳을 ‘거룩한 성’이라고 높여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찬송가 속에 있는 ‘새 예루살렘’은 모든 믿는 이들이 소망하는 장소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언젠가 우리를 그곳으로 불러 올리실 때까지, 우리가 이 땅 위에 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예수께서는 인간 세상에 있는 예루살렘을 보면서 굉장히 슬퍼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닥칠 고통스러운 날들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지나간 예루살렘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서 ‘이렇게 당했구나’ 하고 알지만, 예수님은 살아계실 때 훗날 예루살렘이 당할 일들을 내다보셨습니다. 성경 여러 곳에 이와 관련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마태복음 23:37)
예수께서는 이미 결정된 하나의 사건을 먼저 주목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일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유대인들의 당할 일들을 미리 내다보신 예수께는 그들의 영혼을 동정하여 구출하려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뉘우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잡혀서 끌려가실 때, 많은 여인들이 울면서 그 뒤를 따랐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누가복음 23:28)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재판받으실 때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살리려고 애를 많이 썼지만, 유대인들은 기어코 죽이라고 소리쳤습니다. 예수를 죽이라는 큰 소리를 들은 빌라도는 “내가 한 사람을 풀어줄 수 있는데, 민란을 꾸미고 살인한 강도 바라바를 놓아 줄까, 아니면 유대인의 왕이라는 예수를 놓아 줄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유대인들은 바라바를 석방시켜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빌라도는 손을 물로 씻으면서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말했습니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유대 지도자들과 많은 유대인들은 스스로 그 일의 대가를 받겠다고 했습니다. 그 시대를 살고 있던 유대인들과 이후에 태어날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피 값을 돌리라고 한 것입니다. (마 27:16-26 참조)
당시 유대인들은 그렇게 쉽게 말했지만, 긴 세월을 지나는 동안 그 자손들은 타 민족들로부터 많은 괄시를 받았고 짓밟혔습니다. 지난 2천 년의 세계사를 살펴보면, 유대인들이 얼마나 많은 박해를 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인, 즉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 의해 무참히 죽어갔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면서 “신은 죽었는가? 만약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우리가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되는가?” 라고 괴로운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책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럽의 어느 도시에서 다 파괴되어 잿더미가 된 시가의 쓰레기를 치우던 중 빈 깡통이 하나 발견되었습니다. 누군가가 납땜을 해놓은 깡통이었습니다. 그것을 뜯어보니 일지가 하나 들어 있었습니다. “오늘은 몇 명이 불려갔다. 그 뒤로 소식 없다.”, “오늘은 또 몇 명이 불려갔다. 이들 또한 소식이 없다.” 일지를 기록한 사람은 마지막으로 “오늘은 내가 가게 되었다.” 라고 적은 후 일지를 깡통 속에 봉해 놓고 어딘가에 숨겨 둔 것입니다. 수많은 유대인이 속절없이 죽어갔습니다. 그것이 유럽의 현대사입니다.
그 이전은 어땠을까요?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대인들을 한꺼번에 죽이지 않은 것뿐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참 진행되고 있을 때 유대인들을 한번에 수십 명씩 죽일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 독가스실입니다. 강제로 끌려가 긴 여행을 한 끝에 어느 수용소에 도착한 유대인들은 조그만 비누 하나씩을 들고 샤워장인 줄 알고 들어갔다가 독가스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너무 처참한 죽음 아닙니까?
훗날 이 일들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전범 재판으로 인해 밝혀졌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미디어를 통해 들려오는 세계 소식에 귀를 기울였다면, 이런 사실들이 우리 사회에 많이 발표되었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영화 속에도 그런 내용들이 나타나 있습니다. <오데사 파일>이라든지, <지붕 위의 바이올린>, <젊은 사자들>, <쉰들러 리스트>, <피아니스트> 등 많은 영화들이 그 일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눅 19:42),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눅 19:43), 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마 23:39) 하신 말씀 그대로 유대인들은 겪어왔습니다. 역사가 이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 몇 구절만으로도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삶의 방법이나 근거를 다른 데 두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을 성경에 맞추어 생각하려 하지 않습니다. 관심이 다른 곳에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든 초점을 성경에 맞추어서 역사를 봅니다. 흐트러진 마음으로 함부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역사는 그 일이 일어난 후에 책으로 기록되어 발표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계획은 훨씬 이전에 이미 발표된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수많은 유대인들이 수용소에 끌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무고한 사람들이 조금도 항거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사람이 말로 할 수 없는 끔찍한 상황에서 당하기만 했습니다. 어린 아기들까지도 학살되었습니다. 어느 책에서 읽은 내용인데,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수용소 소장이 자기 아들의 열두 번째 생일에 선물로 총알 열두 개가 든 기관단총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 중에 마음대로 열두 명을 골라서 쏘라고 했습니다. 그때 아들의 총에 죽은 사람들 중에는 그 소장을 가르친 교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유대인이라는 것 때문에 제자의 아들에게 죽은 것입니다. 수용소에 갇힌 유대인들은 이렇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입장에 처해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육십여 년 전 일입니다.
이런 일들을 하나하나 들춰 보면, 정말 인간이 어떻게 이런 잔혹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지 믿어지지 않습니다. 인간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요. 이 땅 위에 역사를 이룬 어느 민족, 어느 족속 중에도 유대인만큼 당한 민족은 없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마 27:25) 라고 했던 말 그대로 당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유럽 여행을 다니면서 유대인들이 비참하게 처형당했던 수용소들의 흔적을 보신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언젠가 독일의 한 도시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참 진행되던 올림픽이 돌연 중단되었습니다. 올림픽에 출전 중이던 유대인 선수들이 감금되어 죽은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젊은이들의 장례식이 올림픽 경기장 안에서 거행되었습니다. 그 일은 하필이면 1940년대에 많은 유대인들의 시체가 불타서 재로 사라진 다카우 근처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끔찍한 다카우 수용소는 언뜻 보기에 하나의 큰 공장 지대 같습니다만, 많은 유대인들의 시체가 불에 타서 시꺼먼 재로 사라진 곳입니다. 큰 광장에는 굉장히 큰 벽 같은 검은 조각이 있는데, 뼈를 얼기설기 엮어서 조각해 놓은 것입니다.*
저는 그 조각을 보고 구약 성경 에스겔서의 한 장을 떠올렸습니다.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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