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회 국내·외 성경탐구모임 2005년 8월 5일 오후
낮은 것과 좋은 것
지난 설교에 이어, 요한복음 2장에 나타나는 가나의 혼인 잔치를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요한복음 2:10)
어떤 이들에게는 이 내용이 그냥 포도주 이야기로만 들릴 수도 있지만, 성경을 좀 아는 분들이라면 예수의 피와 관계있다는 것을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다른 사람들은 잔치의 초반에 좋은 포도주를 내고 나중에는 낮은 포도주를 내는데, 여기서는 나중까지 좋은 것을 두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역사적인 관계까지 생각해 보게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구약 시대를 통해서 수많은 짐승들의 피를 바침으로써 하나님 앞에 제사를 지내왔습니다. 그 제사는 ‘육체의 예법’으로 주어졌던 낮은 것이어서 (히 9:10 참조), 사람의 죄를 온전히 깨끗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짐승들의 피는 나중에 올 진짜 좋은 것, 즉 예수님의 피의 그림자였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교회를 사기 위해서 짐승의 피보다 훨씬 좋은, 사람의 피보다도 훨씬 더 값진 하나님의 피를 바쳤다는 말씀이 나타납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20:28)
여기에서 피라는 것을 한 단계 뒤로 미루어 두고, 낮은 것과 좋은 것, 육체적인 것과 영원한 것의 관계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전도서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1:1-10)
여기에서 조금 주의해서 보아야 될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3절)
물론 거대한 태양계 속에 있는 조그마한 지구라는 땅덩어리에서 인류 전체가 살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전도서를 처음부터 죽 읽어 보면, “해 아래서” 라는 말씀이 자주 반복되면서 “해 아래서” 살아 가고 있는 우리 인생에게 무엇인가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고 되어 있습니다. 넷째 날이 되었을 때에 이 글을 기록하던 모세의 눈앞에 해와 달과 지구의 모습이 보여졌습니다. 즉 참빛의 그림자인 태양과 그 빛을 받아서 어두움에 비추고 있는 달, 그리고 어두운 이 땅의 삼각관계가 보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달은 바로 구약 시대 유대인의 그림자이자, 신약 시대 교회의 그림자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는 과연 어떤 곳인가 생각해 봅시다. 보통 인간은 아무리 키가 커 봤자 2미터도 채 안됩니다. 웬만한 나무보다 작습니다. 시야 또한 좁습니다. 인간의 눈으로는 배를 타고 멀리 나가 수평선만 보이는 바다만 둘러보아도 아득히 넓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과정을 알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내려다보시는 그 안목으로 이 세상을 들여다보면 이 지구는 너무나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북편 하늘을 허공에 펴시며” (욥 26:7), “높이는 일이 동에서나 서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시 75:6-7) 하신 말씀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북편 하늘 너머 어딘가에 존재하는 하나님이 계신 세계를 생각해보면, 우리가 즐기고 좋아하고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이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낮은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해 아래서 유일한 소망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찬송가 404장)
도대체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고린도후서를 읽어보면, 사도 바울이 이상한 말을 한 내용이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12:2-4)
이 말은 사도 바울이 자신을 상당히 낮은 위치에 놓고 시작한 이야기입니다.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가서 인간으로서는 말할 수 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날아다니는 공간인 하늘이 있고, 또 우주 비행사들이 가끔 나가는 우주 공간인 둘째 하늘이 있습니다. 이 둘째 하늘은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미지의 장소로서 이 지구를 둘러싸며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둘째 하늘을 지난 어느 곳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합니다. 시편을 읽다 보면,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29:3),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104:3) 하는 구절들이 나옵니다. 성경은 우리가 미처 상상할 수도 없고 우리 인생사와는 굉장히 거리가 먼 것처럼 느껴지는 어떤 영원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보지 못한 것뿐이지 실제로 그 세계는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본 적도 없는 나라들에 대해서 종종 이야기하곤 합니다. 그런 나라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방송이나 신문 같은 언론매체를 통해서 보거나, 지도 등을 통해 보아서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늘나라’, 즉 ‘해 아래서’ 살고 있는 우리 인생들이 그리워하고 추구해야 할 영원한 나라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전도서 3:11)
한국어 성경에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이라는 표현으로 되어 있지만, 뉴킹제임스 성경에는 “He has put eternity in their hearts”(그들의 마음속에 영원을 심어 놓았다) 라고 아주 직접적으로 표현해 놓았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아주 단순한 생각입니다. 어릴 적에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면서 붉게 물드는 저녁 노을을 바라보면서 느꼈던 감정과 생각들, 그런 것들을 돌이켜보면, 아직 무엇이 죄인지도 몰랐던 어린 시절부터 우리 마음속에는 그리워하고 가고 싶어하는 어떤 미지의 세계가 분명히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뭐라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마음의 고향이 우리 속에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전도서를 보니,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영원을 심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전도서에서는 “해 아래 수고하는 인생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 누가 알며 그 신후에 해 아래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 (전도서 6:12)
우리가 살아가는 이 인생의 모든 날들이 그림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에 바로 이어서 나오는 내용이 “해 아래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하는, ‘해 아래서’입니다. 태양이 세상을 비췰 때 나타나는 것이 그림자입니다. 해가 떠 있을 때 건물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오가는 사람들 모두 그림자와 함께 다닙니다. 해 아래 사는 우리 인생에게는 항상 따라다니는 그림자가 있습니다. 그림자는 그냥 있는 것일까요? ‘자연 현상이기 때문에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겠지, 뭐.’ 이렇게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로마서에는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1:20) 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 라며 하나님을 무시했던 그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 앞에 서면 그것을 변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유구무언일 것입니다. 저 위에서는 태양이 나를 비추고 내 그림자는 이 땅에 펼쳐져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또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와 같이 보내는 일평생” 이라는 말씀을 볼 때, 이 조그만 지구 위에 모여서 욕심내고 싸우는 이 인생 자체가 바로 우리 마음속에 심어 주신 영원을 찾아가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진짜 것을 찾기 위한 그림자적인 모습이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마 5:25) 는 말씀은 인생길에 있을 때 화해하라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이 ‘길’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인생이 “해 아래에 있을 때”, 아직 이 육체를 쓰고 살아가고 있을 때를 말합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피를 이어, 어머니의 육체를 통해서 태어났습니다. 우리 조상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죄에 빠졌고, 그 죄인 된 육체를 통해서 태어난 나 역시 죄인입니다. 유대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지고 그들이 성경을 완성해 갈 때 우리 이방인들은 우상을 숭배하고 죄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 이방인의 피를 이어받은 내가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요? 도대체 내가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를 보일 수 있을까요? 이스라엘 민족이 짐승의 피를 드렸듯이, 죄 덩어리인 이 인생 자체에서 나온 피를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내 죄가 해결될 수 있을까요?
죄를 씻는 하나님의 피
한 가지 희망은 하나님께서 사람 속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두셨다는 것입니다. 참 특이하게도 이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 또 있습니다.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이사야 57:15)
‘지존무상하다’ 그 위에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영원하고 거룩하다고 자처하시는 그분께서 ‘나는 통회하고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니 이는 그들의 영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에서 요한복음 1장 1절의 말씀을 잠깐 생각해 봅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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