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회 국내·외 성경탐구모임 2005년 8월 2일 오후
우리의 영혼을 적셔주는 성경
제가 강연을 시작하기에 앞서 제일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성경이라는 완벽한 원고가 있기 때문에 그 외에 아무것도 준비한 것 없이 제가 보았던 내용을 설명해 드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성경을 늘 읽어 오셨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마실 수 있는 음료의 종류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물보다 더 좋은 음료가 또 있습니까?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이 세상을 마칠 때까지 물에 싫증내지 않고 항상 필요로 합니다. 성경도 그와 같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이 갈한 육체에 꼭 필요한 물처럼 우리의 영혼을 적셔주고 우리 마음을 느긋하게 해주는 데 제일 좋은 것입니다. 늘 읽는 말씀이지만, 이것을 싫증내는 사람이 세상에 있겠습니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성경이 영혼에 가져다 주는 도움보다 더 큰 도움은 없을 것입니다. 저는 성경을 읽을 때, 늘 읽던 내용이지만 ‘또 더 무엇이 없을까?’ 하고 찾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성경을 많이 본다는 뜻은 아닙니다. 습관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이나 친구들을 만날 때는 싫증을 내지 않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꼭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는 우리 영혼과 부합되는 내용들이 많기 때문에 늘 읽고 자세히 찾아볼수록 그 말씀과 점점 더 친해지고 가까워집니다.
제가 성경을 가까이한 지 벌써 40년이 조금 넘었는데, 만약 성경이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전에 성경을 몰랐던 것은 아닙니다. 어릴 때부터 저희 집 방바닥에는 커다란 성경책 한 권이 놓여 있었습니다. 제 아버지께서 늘 읽고 낭독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1962년 4월 7일 이전까지는 성경을 그렇게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늘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달갑지도 않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농촌 집의 대청마루 끝이나 벽에 ‘입춘대길(立春大吉)’이라고 크게 써놓는 것이나 어떤 부적처럼 ‘성경도 아마 종교적으로 그런 것일 게다.’ 라는 것이 그때의 제 생각이었습니다. 성경을 가까이하고 싶어도, 수면제 중에 최고의 수면제가 바로 성경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정신이 말똥말똥하다가도 예배당에 가서 설교를 들을 때는 왜 그렇게 졸리던지, 어떤 때는 허벅지를 꼬집어 뜯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성경 말씀을 들을 때마다 몸살을 앓았습니다. “귀하고 귀하다 우리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재미있게 듣던 말” (찬송가 234장) 하는 찬송가를 듣거나 같이 부를 때, ‘무엇이 그렇게 귀한데?’ 라는 의문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또 찬양대에서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생명의 말씀은” (찬송가 235장) 하는 찬송을 들었지만, 달기는 커녕 차라리 내가 사춘기 때 남이 볼까봐 혼자서 이불 폭 덮어쓰고 조그마한 불 켜놓고 보던 조금 쑥스러운 내용의 책이 더 달고 오묘했습니다. 남에게 들키면 창피한 어떤 내용들 말입니다. 그 당시 저에게 성경은 그만큼 멀리 있었습니다. 그래도 윗대부터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모태교인이라는 자부심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 깊숙이에는 항상 삶에 대한 의문이 많이 있었습니다. ‘다른 것이 있을 텐데....’ 라는 의문이었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해 보았느냐 하면, 제 마음은 늘 계절보다 몇 달 앞서 달렸기 때문입니다. 여름도 지나기 전에 벌써 가을 노래를 불렀고, 겨울을 맞이하기 전에 벌써 봄 노래가 나왔습니다. 왠지 모르게 마음은 빨리 앞서 갔습니다. ‘내 현실과 맞지 않는 것을 내가 느끼고 있구나. 이것을 누가 붙잡아 줄 수 있는 힘이 없을까? 무엇이 나를 붙잡아 줄까?’ 이런 생각을 했던 때는 방황하거나 흐트러진 마음을 가지고 살던 시절이 아닙니다. 가장 정신을 차려서 살려고 하던 때입니다. 제 나이 스물두 살 접어들던 때에 제가 했던 생각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지금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도 많이 방황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 봅니다. 그렇지만 저는 방황한다고 해서 정처 없이 허덕이며 헤매고 다녔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남 보기에는 참 정리 정돈이 잘된 청년이었습니다. 들판에 앉으면 그림 그리고, 방안에 들어가면 책 읽고, 적어도 겉보기에 흐트러진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마음만 헛되이 오늘도 달리건만 (포스터의 스와니강)
이 노래와 같았습니다. 큰 포부를 가지고 전진할 나이인데도 과거에 대한 여러 생각들이 자꾸 꼬리를 물고 일어났습니다. 어린 시절에 헤어졌던 친구들, 어떤 때는 전쟁으로, 또 어떤 때는 전학을 가서 헤어져야 했던 그 아기자기한 친구들이 정말 그리웠습니다. 마음속에는 항상 큰 그리움으로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년 시절에 배웠던,
그리운 날 옛날은 지나가고들에 놀던 동무 간 곳 없으니이 세상에 낙원은 어디뇨
이 노래처럼, 무엇인지 안타깝고 그리운 날들이 계속되었습니다. 커오는 동안 군에 가거나 멀리 떠나서 헤어진 친구들도 생겼습니다. 그들이 전부 한 얼굴로 그리워졌습니다. 특히 혼자 있을 때는 책을 읽거나, 들판에 그림을 그리러 가거나 무엇을 해도 더욱 그러했습니다.
한 없건만 내 마음 울고 울어그대 없는 설움에 한숨 쉬네떠나간 옛 모습은 어디뇨 (포스터의 올드블랙조)
이런 노래들이 내 현실로 다가와 있었던 것입니다. 자꾸만 멀어져가고 흩어져가는, 내 생각이나 기억을 붙잡아 줄 수 있는 현실은 너무나 불완전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 세상 무엇으로도 위로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소박한 소망이 있었다면, 세상에 사는 동안 남들 못지않은 위치에 선다면 헤어졌던 옛 친구들을 다 모을 수 있지 않을까, 서로서로 연락하고 모여서 같이 한번 즐겨보면 좋지 않을까, 잠시였지만 이런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그때는 어떤 대책 없이 앞날을 향해서 걷고만 있었습니다. 살아가고만 있었습니다.
그때 그랬던 이유를, 제가 나중에 성경을 가까이하면서 깨달았습니다. 나라는 인간의 육체는 먹고 입어 가면서 지내 왔는데, 영혼을 위해서는 어떤 것도 챙겨 준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취미생활을 하거나 어떤 글을 읽는다는 것도 겨우 혼에 영향을 주는 것이었지, 마음 깊숙한 곳의 양심에는 너무나 많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내가 그렇게 달갑지 않게 생각했던 성경이 내 것이 된 후에는 그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늘에 먹장 같은 구름이 꽉 끼어 있을 때는 머리도 무겁게 느껴지지만, 비가 한줄기 쏟아진 후 햇빛이 반짝 나면 마음이 가벼워지듯이, 성경 말씀이 내게 주어진 그날 이후 제 생각은 저절로 바뀌었습니다. 그 후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동정이 갔습니다. 이제는 내가 그 불쌍한 대상이 아닙니다. 과거 유행가의 한 곡조,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이나 ‘꿈에 본 내 고향’ 같은 노래를 들어보면, ‘그것 참, 나는 그 가사와 같은 생활은 하지 않았지만, 내 정신 상태는 그 사람과 똑같았겠구나. 정말 처절하게 불쌍했던 영혼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빛도 없고 어떤 서광도 비취지 않는 깜깜한 곳에서 웅성웅성 사람들의 소리만 듣고 지내며, 누군가에게 부딪치면 ‘미안합니다.’ 라고 하고, 또 발을 잘못 디디면 몇 계단 굴러 떨어질지 모르는 상태와 같습니다. 이럴 때에 꼭 필요한 것은 밝음입니다. 내 영혼이 밝아질 때에 그 모든 어두움은 사라지고 정리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노래를 유창하게 부르면 또 들어봅니다. ‘내 맘에 남 모를 허공 있네.’ 사실 허공은 진짜 있었습니다. 소월이 지은 시 중에 ‘허공 속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하는 시를 읊어 보면 ‘참, 나도 저 무리 속에 하나였구나.’ 합니다. 어느 날 말씀이 내게 주어짐으로써 그러한 과거 세월이 정리 정돈이 되었습니다. 성경 이외에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이 책, 저 책들을 많이 읽어보며 비교해 보았지만 다른 것에는 없었습니다. 이것은 성경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것을 왜 나는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가를 돌이켜 보면, 성경에서 그런 문제가 해결된다는 말을 아무도 제게 해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교회를 다니더라도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삶은 그저 남들이 가는 대로 막연히 따라가는 것일 뿐입니다.
성경으로 인한 영원을 향한 발걸음
저는 사람들이 나이 많은 어르신에게 ‘만수무강하세요’ 등의 말을 하면 ‘저것은 욕이다, 욕.’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살 만큼 살고나면 몸 하나 지탱하기도 힘들고 무엇을 씹기도 힘드니까요. 요즘 뉴스 들어보니까 65세는 고령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제 저는 ‘나도 새파랗게 젊을 때가 있었다.’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나이와 상관없이 하나 다른 것이 있다면, 우리가 흘러 보냈던 말과 이야기들 속의 ‘영원’이라는 말, 그 ‘영원’이 사실이고 실체고 확실한 것이라는 것을 저는 성경에서 터득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데서는 알 수 없었습니다.
유행가들 중에는 ‘영원히 영원히 그대만 알고 싶소’ 하고 ‘영원’이라는 가사가 많이 나오기는 합니다만, 그 ‘영원’은 성경이나 찬송가에서 말하는 ‘영원’과는 전혀 다른 말입니다.
영원토록 내 할 말 예수의 피밖에 없네 (찬송가 184장)
이 찬송가에서 말하는 ‘영원’은 성경으로 해결될 수 있고, 성경에서 믿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으로 인한 ‘영원’을 향한 발걸음은 세상의 나그네 같은 모든 인생들에게 제일 좋은 빛입니다. 만약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이것 없이 죽는다면 어떨지 한번 생각해 봅시다.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 앞으로 백 년 후에는 몇 사람이나 살아 있을까요. 백 년도 되기 전에 자기 몸을 비우고 떠나는 영혼이 많을 것입니다. 떠나는 영혼은 영원히 자기 몸을 비우고 가버립니다.
며칠 전에 자다가, 생각지도 않던 어떤 사람이 제 앞에서 빙긋이 웃는 꿈을 꾸었습니다. 아는 사람이지만 저와는 등을 돌리고 사는 사람인데 제 앞에서 웃기에 깜짝 놀라서, ‘저 사람이 내 앞에서 웃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닌데.’ 하다가 깼습니다. 깨 보니까 제 곁에는 이불밖에 없었습니다. 꿈이 왜 그렇게 현실 같은지. 꿈을 꿨다는 사실은 확실합니다. 잊어버려서 그렇지 꿈을 꿔 보지 않은 사람은 이 지구상에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이상한 것은, 그런 것을 기억하고 있는 나라는 사람에 담긴 내 영혼이 육신을 그냥 두고 떠나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영혼이 몸 안에 있는 동안에 우리는 우리의 시각이나 청각, 이 모든 감각 기관들을 통해서 참빛을 더듬어 찾아 발견해야 될 의무를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행 17:27) 라는 말씀처럼,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 세상의 모든 것들, 입고 있는 옷이나 자동차, 하늘을 날고 있는 비행기들, 우주의 인공위성까지 저절로 생긴 것이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한다면, 그 사람은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때부터인가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가면서 학문을 터득했습니다. 그렇게 공부하는 사이 ‘자연’이라는 말을 ‘nature’ 라는 뜻의 자연이 아닌, ‘저절로’ 라는 뜻으로 많이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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