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를 생각하며 44회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브리서 12:1-22005. 4. 9. 강연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2:1-2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히브리서 12:1이 말씀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내용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은 사람은 그 생애가 결정 나 있고 피할 수 없는 어떤 삶이 있는데, 그 삶의 연속이 곧 나머지 생애입니다. 예수를 믿은 이후의 생애는 믿기 이전의 생애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확실히 믿은 후에는 어떤 종교적인 열심이나 행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하나님을 의뢰하며 어떻게 살았다, 믿고 어떻게 세월을 보내며 생을 마감했다 하는데, 우리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며 행하는 방법들을 보면 참 열심을 냅니다. 전에 뉴스에서 굉장한 권력이 있는 위치에서 선한 일을 많이 했다는 어느 종교 지도자의 장례식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수백만 명이 그 사람의 장례식에 몰려들어서 많이 울기도 하며 애도하는데, 한 사람의 죽음이 너무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해 있었습니다.죽음에 대해 별 생각이 없는 사람이라면 ‘와, 대단하다.’ 하겠지만,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운집해 있는 그 많은 사람들의 영혼에 대해 생각할 것입니다. 믿음은 각자가 다르니 애도하는 그 많은 사람들의 영적 상태가 떠나간 그 사람과 같은지 아닌지를 생각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마 7:13 라는 말씀대로, 좁은 문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을 비교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좁은 문, 거듭나지 않으면 볼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다는 하나님 나라 요 3:3, 5 참조, 그 기준에서 이 세상의 크고 작은 종교 행사 전체를 생각하면 개인의 영혼은 숙연해질 뿐입니다. 그런 크고 작은 행사들이 있을 수 있도록 했던 장본인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입니다.그런데 그러한 예수를 따라다니던 베드로가 묻혔다고 알려진 곳에 한 종교의 역대 지도자들이 묻혀 왔습니다. 그렇든 아니든 나는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서 어떤 위치에서 걸어왔는가, 또 걸어가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분주하게 걸었든 열심히 걸었든, 표면에 나타나는 일만이 전부는 절대 아닐 것입니다.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과 직결되는 문제는 개인 영혼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앞서 이 히브리서에 나타난 사람들이 걸어간 길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세상을 살다가 생을 마쳤다는 것과 직결되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을 위해서 그들에게 예비하신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남은 사람들이 먼저 간 사람들의 일을 잇지 않으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니 후 시대 사람들이 해야 한다, 이것이 히브리서 11장 마지막의 이야기입니다.그렇다면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하는 말씀은 먼저 간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화려하게 장례를 치렀거나 선한 일을 많이 했다거나 하는, 보기에 좋은 종교적인 모습이나 외형적인 모습에 대해 증인으로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진짜 일이 있습니다.세상에는 별의별 종교가 다 있습니다. 크게 구교와 신교가 있고, 구교에서도 갈라진 종파가 있고 신교에도 많은 종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외형은 생김새도 다르고 머리 색도 다르고 다 다르지만, 모두가 가지고 있는 믿음 하나는 같아야 합니다.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엡 4:5 라는 말씀대로 ‘하나’에서 시작된 표본이 있기에, 모두가 똑같아야 한다는 기준이 있습니다. 그래서 에큐메니컬적인 정신으로 신교와 구교가 손을 잡고 서로 조금 양보해서 친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외형적인 것입니다.천 년 전 신앙이나 백 년 전 신앙이나 지금 신앙이나 또 백 년 후나 2백 년 후나 내적인 영혼의 변화로 인해 믿게 된 모든 사람의 믿음은 같아야 합니다. 이 믿음에 다른 것을 섞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믿음으로 나의 마음 지금 깨끗하였네 어느 성도가 믿음으로 자기 마음이 깨끗해졌다, 영혼이 깨끗해졌다, 영혼에 변화가 왔다고 단순하게 가사를 썼습니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벧전 1:9 하는 결과가 이루어진 것을 기준으로 볼 때 외형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신교든 구교든 할 것 없이, 종파나 종교의 모습에 따라 결정되는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이 중요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 7:13-14, “너희는 먼저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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