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월 5일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
우리는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 (사 28:23) 는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우리 생활에서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가까이하는 사람들 가운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내게 직접 말씀하신 것이다.’ 라는 말을 그냥 구절로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또박또박 읽는, 단어로 이어진 구절로만 보면 안됩니다. 그 구절들은 어떤 스토리를 이어주고 있고, 그 모든 것이 합해져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창 13:15) 했을 때의 말씀에는 구절만이 아니라, 그들 삶의 흐름, 생활 패턴이 녹아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삶을 보려고 하기보다는 너무 안이하게, 구절만 찾아서 봅니다. 자신이 구원받을 때 ‘어떤 구절에서 받았다.’ 하는 식으로 성경을 보니까, 너무 구절에만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을 공부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상당히 뒤처진 생활을 하게 됩니다. 저는 성경을 보면서 ‘이런 말씀이 있었던가.’ 할 때도 있습니다. 오래 전 제가 구원받을 당시에도 하나님께서 제게 이런 말씀들을 주셨지만, 지금 볼 때는 또 다르다는 것을 하나하나 느낍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읽을 때는 성경의 전체적인 흐름이 우리에게 어떻게 도움을 주는지에 유념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앞에서 숙연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셨고 그것은 변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절대적으로 이행되어 왔습니다.
꼭 필요한 매일의 지침서
이런 사실을 볼 때 시편에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62:11) 하신 말씀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능력을 나타내려고 하실 때, 나도 하나님 말씀에 준해서 하나님께 기대고 의존하고, 하나님께 내 갈 길을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을 의뢰하고 살아간다는 것 이상의 다른 무슨 자랑이 필요하겠습니까. 이런 찬송이 있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찬송가 102장)
“이 세상 부귀와 명예, 행복과 바꿀 수 없네” 하고 부르는데, 그 찬송이 과연 소리로, 말로, 곡조로만 이어지고 치울 노래입니까 아니면 내 생애에 꼭 필요한 지침서입니까?
운전하는 사람들은 낯선 곳에 갔을 때 길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길을 잃어버리면 옆 사람에게 지도를 가지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지도를 보며 다시 길을 찾아갑니다. 옆 사람은 지도를 보고 어느 쪽으로 얼마만큼 가면 되겠다고 가르쳐 줍니다. 요즘에는 위성이 발달되어 차 안의 화면으로 자신이 있는 위치와 목적지를 보여주는 기계들도 있습니다. 꼭 가이드북 같습니다. 골목골목이 다 나와 있어서 그것만 보고 따라가면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에게도 그런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에게 제대로 된 지침서가 있으면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그런데 진짜 지침서가 있다는 것을 모르니까 사는 동안 힘들고 어렵고 고달픈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중에 “나 피곤치 아니하며 저 위험한 곳 내가 이를 때면” (찬송가 446장) 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찬송가는 부르는데 그 힘이 약합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 민족의 3,800년 동안 흘러온 역사를 쭉 살펴보면 시편 말씀과 아주 닮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라” (23:4),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는 (시편 23편) 말씀은 한 민족의 생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생존권과 생존 모습을 설명합니다. 이것은 개인의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시 23:1-2) 하는 말씀대로 하나님이 내 생애를 인도하십니다. 여호와 자신,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십니다. 목자이신 하나님은 잃어버린 양을 찾으려고 들에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 한 마리를 찾지 않았습니까. (마 18:21 참조)
육체에 있어서도 영혼과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역사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삶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지켜보십니다.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신명기 11:12)
유대인에게 말씀하신 이 내용은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고 구원받게 하신 것을 보면 우리도 아브라함이 받은 것과 동일한 약속을 받은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그 약속이 영혼에만 국한된 것입니까 아니면 육신에도 관계되는 것입니까? 육신의 마지막 모습과는 관계가 있습니다. 언젠가 육신이 변하는 날이 오기 때문입니다. 최종적인 축복은 그렇게 주어집니다. 그런데 지금의 삶에서도 말씀을 따라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그 삶을 축복해 주십니다.
말씀을 어길 때는 채찍이 있습니다. 육체에 가해지는 채찍이든 정신적으로 가해지는 채찍이든 둘 중 하나는 우리에게 가해집니다. 하나님의 징계가 내렸을 때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도 있고 육체적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정신적인 고통보다는 육체적인 고통이 조금 낫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우리는 견딜 수 없는 육체적 고통은 바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도 그렇고 축복도, 아브라함을 통해 그 민족들에게 주어진 약속과 똑같은 약속이 우리에게도 주어집니다. ‘우리는 영적인 백성이니 저 나라에 가서나 편할까’ 하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삼 1:2) 하는 사도의 바람과 심정이 있었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 삶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무언가 우리 생활을 도우시려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볼 때 구절구절 무슨 도덕경 읽듯이 읽습니다. 또 실컷 세상 이야기 해놓고 성경 한 구절 인용하는데, 그렇다면 다른 종교와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세상에도 비슷한 말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들이 모두 이행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들이 이행됐느냐 안됐느냐 하는 것은 유대인을 보면 압니다. 유대인들은 그 증거로써 존재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의 내력
그렇다면 우리 자신의 개인 생활은 어떻습니까?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을 동일하게 받은 우리는 얼마나 그 약속을 토막내버렸는지 모릅니다. ‘내 한 생애만 잘 살면 되겠지. 잘 믿으면 되겠지.’ 이렇게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영혼과 우리의 영혼은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을 받아들이는 통로도, 귀나 눈이나 모두 똑같습니다. 그러니 지금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약속이 적용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은 우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입니까?
요즘 사람들은 축복이란 것을 잘 믿지 않습니다. 많은 신앙인들은 누가 길게 기도해서 축복을 내려준다고 하면 싫어합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누가 축복 기도하면 웃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바로 통하는데.’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기 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어떤 약속을 주셨는데 그것에 대해 아브라함은 철두철미하게 확답을 받아 갔고, 그 약속이 그대로 이행됐다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아브라함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 15:5)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때 아브라함의 생애 자체는 캄캄했습니다. 자신도 늙어가고 부인도 늙었는데 자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삼천 년 전 먼 옛날, 당시 사람으로서는 오래 살고 있다고 해도 그 역시 나이가 들고 쇠퇴해져 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식 없는 상태에서 두려웠고 아주 서글펐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손에 대한 약속을 하셨을 때도, 아브라함은 자신이 다메섹에서 데려온 엘리에셀이나 후사로 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엘리에셀을 자기 상속자로 생각한 것입니다. “캄캄함이 임하므로 아브람이 심히 두려워했다” (창 15:12) 는 말씀대로 자신 없고 희망도 없고 그저 앞이 캄캄했던 것이 아브라함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을 분명히, 뚜렷이 이행하고 계셨습니다.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창 13:15) 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믿기 힘들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기대했습니다. 그럴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세는 어떠했습니까. 조카 롯에게 먼저 있을 장소를 택하라고 했습니다. ‘네가 우편으로 가면 나는 좌편으로 가겠다. 네가 좋은 것을 먼저 택하라.’ 롯이 보니 무척 아름답고 넓은 들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넓은 들판을 보니 탐이 나서 그쪽으로 갔습니다. 그 지방 사람들이 너무나 악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곳을 택해 간 롯이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장소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장소와 전혀 다른 곳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삭막한 들에 친 장막 문 앞에서 천사를 만났지만 롯은 소돔 성문 앞에서 천사를 만났습니다.
신약 성경에 보면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의로운 롯의 심령이 상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벧후 2:7-8 참조) 오늘 우리들의 생활을 예로 들어봅시다. 밤늦은 시간에 TV채널을 돌리다 보면 ‘저건 우리 아이들이 보면 안 될 텐데....’ 하는 생각에 마음이 조마조마해집니다. 채널은 마구 돌아가는데 밤늦은 시간의 TV 내용이 빤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이 마구 공개되고 있습니다. 의로운 롯의 선한 심령이 상한다는 말에 대해서는 삼천 년 전으로 돌아가야만 알 수 있습니까 아니면 오늘의 우리들 또한 그것을 보고 삽니까?
그런 상태에서 성경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이여, 당신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이 있다면 나에게도 적용되는 것을 압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가 나옵니다. 푸념의 기도보다는 자기 갈 길을 밝혀 달라는 기도가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난 자리와 롯이 하나님을 만난 자리가 판이하게 달랐듯이 훗날 예수께서 갑자기 다시 오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 두 종류의 사람이 주님을 만납니다. 외부 사람은 상관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먼 이국에서 이방인 시절에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 12:1) 고 하나님이 말씀하시자 모든 것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에 들어오기 직전에 하란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겪습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을 디뎠을 때 하나님께서 약속을 그 사람에게 이루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면 가나안 땅에 오기 전에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가 죽었다는 내용은 우리와 상관없을까요?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에 과거를 돌아보면 우리에게는 옛 성품이 그대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벧전 1:18-19) 하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오기 전에 옛 사람이 묻히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그의 아비는 거기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약속하십니다.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창 46:3) 이 모든 약속들은 롯이 아브라함 곁에 있을 때와 떠난 후가 다릅니다. 구원받은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축복이 아무에게나 마구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하나님께 가까웠느냐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축복을 주십니다.
만약 성경이 없었다면, 저라는 존재는 세상에서 벌써 무너지고 없어졌을 것입니다. 또 구원받은 이후에도 성경과 함께 살기로 작정하고 따르지 않았다면 지금의 저는 존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렵게, 어렵게 살아갈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길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어렵기는 하지만 그렇게 답답한 생은 아닙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주와 함께 길을 가는 것이 보통 일입니까.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거울이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말씀을 보면, 이들이 다 믿음을 따라 갔으며, 믿음을 따라 살다 죽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히 11:15-16) 는 말씀이 있습니다.
축복의 조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 (창세기 12:1-4)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축복을 받는다’는 말씀이 유대 역사에는 철저하게 지켜져 왔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이 시작되고 확실한 복음이 머물러 있는 교회에는 아무나 손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자기 이론이 맞는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이 이행되는 것에는 함부로 손댈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법궤를 찾아오던 날, 법궤를 옮기던 사람이 법궤가 움직이니까 손을 댔습니다. 그는 분명히 약속된 민족의 백성이었는데도 죽어 버렸습니다. (삼하 6:1-7 참조) 그 법궤는 고핫 자손만이 메어 옮기게 되어 있습니다. 수레에 싣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윗은 법궤를 찾아왔다는 사실에 즐거워 춤을 추었을 뿐이지 그 법을 몰랐던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법칙은 한 번 약속된 것은 끝까지 약속대로 이행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보면 유대 민족을 압박한 민족들은 모두 혼이 나거나 망했습니다. 너를 저주한 자들은 저주를 받는다, 너를 축복한 자는 내가 축복한다 하신 약속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축복을 받은 사람이었고, 이러한 약속이 있었기에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역사가 계속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축복받은 민족이 지금 자기 땅을 회복해가고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봅시다. 얼마나 급하게 예수를 믿었는지 주님 오실 때 나 하나만 들려 올라가면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 어리석은 신앙생활을 꽤 오래 해왔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개인의 신앙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자기 구원이 확실하다면 가족들을 구원받게 하든지 남들에게라도 직접 전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직접 하지 못했을 때에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준비하는 일이라도 거들어야 합니다. 이 축복은 자신과 직접 관련된 축복이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자기가 받을 상과 직접 관계되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디에 청함을 받아 가셨을 때인데, 초청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을 보셨습니다. 이런 것을 보시는 예수님의 눈은 달랐습니다.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누가복음 14:13-14)
왜 이런 사람들을 초대하라고 했을까요?
이 죄스러운 세상에 사는 동안 사
로그인하시면 전체기사와 사진(동영상)을 볼수 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