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종교 개혁과 그 영향 11. 독일의 종교 개혁종교 개혁을 의미하는 단어 ‘Reformation’은 새롭게 만들다, 변화하다라는 뜻의 라틴어 ‘reformare’에서 유래한 말로, 중세의 교회를 새롭게 변화시킨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세 시대의 교회는 교황을 중심으로 대주교와 주교, 그리고 그 아래 많은 사제들로 구성된 하나의 조직 체제를 갖춘 거대한 기관이었습니다. 종교 개혁은 성경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권위적이고 세속화된 거대 교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움직임이었습니다.독일의 종교 개혁은 1517년부터 약 40년 동안 마르틴 루터를 중심으로 일어났습니다. 루터는 1483년에 독일 중부 지방에 위치한 아이슬레벤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다 1505년에 학교를 그만두고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512년에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그곳에서 신학 교수로 활동했습니다. 그 후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한 로마서 1장 17절 말씀에서 믿음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깨닫고 종교 개혁에 나섰습니다.마르틴 루터는 1517년에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성 교회의 정문에 게시할 때만 해도 가톨릭교회에서 분리해 나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저 면벌부가 성경과 맞지 않다는 점에 대해 공개적으로 논의하기를 원했는데, 그의 글이 독일 및 전 유럽에서 큰 호응을 받게 되면서 논란이 급격하게 확산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종교 개혁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당시 독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카를 5세였습니다. 신성 로마 제국은 영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통일된 중앙집권적 군주국이 아니라 2백 개가 넘는 크고 작은 공국들이 모여 하나의 연맹 체제를 이룬 국가였습니다. 수많은 영주들이 영토를 다스렸고, 일곱 명으로 구성된 선제후들의 결정에 따라 황제를 선출했습니다. 황제를 선출할 수 있는 선거권이 있었던 선제후들의 권력은 막강했습니다. 루터가 종교 개혁을 할 때 많은 영주들이 그를 지지했는데, 작센 지방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루터를 특별히 보호하고 끝까지 지지해 주었습니다.1517년 이후 루터는 가톨릭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했고, 1521년에 보름스에서 열린 제국 의회에서 카를 5세로부터 사형 선고와 다름없는 칙령을 받았습니다. 같은 해에 바르트부르크성으로 피신한 루터는 그곳에서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해 이듬해인 1522년에 출간했습니다.그 후 독일 슈파이어에서 두 번의 제국 의회가 열렸는데, 1526년에 있었던 첫 번째 제국 의회에서 보름스 칙령의 적용이 유보되었습니다. 당시 카를 5세는 프랑스와 교전 중이었던 데다가 오스만 제국의 위협까지 받고 있었기에 국내의 분란을 피하려는 목적에서 루터의 추방을 유보하고 다음 종교 회의가 열릴 때까지 각 제후들이 다스리는 영토에서 신앙의 자유를 가질 수 있다고 선언했습니다.그러나 그 후 국제 정세가 안정되자 1529년 두 번째 슈파이어 제국 의회 때는 앞서의 선언을 철회하고 보름스 칙령의 엄수를 명령했습니다. 이때 종교 개혁에 뜻을 함께하는 개신교회 제후들이 항의서를 제출했는데, 그때부터 개신교를 항의자라는 뜻의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 후 개
정회원으로 가입하시면 전체기사와 사진(동영상)을 보실수 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