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를 생각하며 2회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브리서 1:1-32003. 12. 6. 강연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1-3선지자들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히브리서 1장 1절부터 3절까지 읽겠습니다.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저는 나름대로 성경을 많이 읽었다고 생각하는데, 히브리서 1장 1절부터 3절까지의 짤막한 세 구절을 읽으면 ‘아직 멀었구나. 성경을 더 봐야겠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 숫자에 대해서 생각하다 보면, 옛날 사람이 맨 처음 수를 배울 때, 1부터 시작되는 그 숫자를 어떻게 알게 되었을지 의문이 생깁니다. 어린아이들이 처음 숫자를 배우는 것을 보면 손가락을 꼽아 가며 ‘하나, 둘.’ 하고 셉니다. 1, 2, 3, 4부터 큰 숫자까지 쓰고 헤아리면서 두뇌가 발달하고, 그 수를 가지고 더하거나 빼거나 곱하거나 나누어 보면서 점점 복잡해지는 수에 대해 새롭게 배워 갑니다.그런데 성경도 이상하리만큼 이와 참 닮은 데가 있습니다. 다른 책은 읽으면 대부분 다 이해할 만하고 쉬운데, 성경은 읽을수록 알 것 같으면서도 가장 어려운 것 같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중요한 문제에 부딪혀 수학 문제를 푸는 것보다 더 복잡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복잡해진다고 해서 얻는 것이 없지는 않습니다. 제시된 어려운 문제를 풀었을 때 쾌감이나 희열이 오듯이, 성경도 많이 읽을수록 무언가 더 많은 것을 알게 되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우리가 들을 거닐다가 조그마한 산을 만나 그 산을 오른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산이 바윗돌만 있고 나무가 별로 없는 민둥산이라면 별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능선과 계곡을 따라서 자꾸 올라가는데 첩첩산중이고, 물소리나 새소리가 들리고 나무가 우거진 모습, 바윗돌이 어우러져 있는 모습, 산과 산 사이에 구름이 흘러가는 모습 등의 경치를 보면 우리 생각이 그것들에 이끌려 젖어 갑니다. 그렇게 은연중에 산속으로 묻혀 갑니다. 성경도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정신세계를 많이 끌어가 주는 것이 있습니다.히브리서 1장 1절부터 3절까지를 보면 이 구절들이 성경의 중심된 내용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컴퍼스의 침을 꽂고 돌리면 원이 그려지는데, 벌리는 정도에 따라 크기가 다른 원을 그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침을 꽂은 자리는 원의 중심이 됩니다. 이처럼 히브리서 1장 1절부터 3절만큼 성경의 중심에 초점을 맞춘 것 같은 표현이 성경에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세계 각 나라에는 나라마다 자기들의 내력을 설명하는 역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인이라고 하는 유대인들, 즉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먼저 주어졌던 편지인 히브리서는 그 민족의 역사 속에서 조상 대대로 흘러 오고 배워 온 내용들을 설명하기 위해 주어진 중심되는 내용을 담은 성경입니다. 즉 히브리인들에게 읽으라고 준 내용인데, 그것을 우리가 성경에서 조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장 1절부터 3절까지의 이 내용이 유대인 아닌 다른 민족, 한국이나 중국이나 또는 프랑스나 스페인이나 영국 같은 서양 다른 나라에 기독교가 전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전해졌다면, 이것이 무슨 내용인지 전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느 집에 붙여 둔 부적보다 더 못한 내용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이 유대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유대인이 볼 때는 무언가 알 듯도 한 내용입니다.여기에 하나님의 아들이 만물을 만드시고 말씀으로 붙드신 분이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유대인들은 그 아들이 예수라는 것은 언급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 내용이 분명히 자기들의 것임을 알 지만, 그 아들이 예수라고 설명되는 것에 대해서는 민족적으로 허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유대인 개개인들에게 이 말씀에서 말하는 이 아들이 누구냐고 물으면 창조자의 아들 예수라고 설명은 합니다. 그 사실이 2천 년간 그렇게 전해져 왔습니다.그렇다면 유대인 아닌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는 히브리인들, 즉 옛날 아브라함 때부터 그 후손들이 태어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유대인들은 ‘창조자가 계신다. 만물을 붙들고 있는 분이 계신다. 우주에 오로지 한 분이 계신다.’ 하는 내용들을 정확하게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고집할 만큼 민족적 자부심도 있습니다. 그에 반해 이방인인 우리들은 민족적으로 이러한 내용들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그런데 2천 년이라는 세월 동안 기독교 역사가 흘러 오면서 기독교인들은 스스로 어슴푸레하게 자신들이 어느 정도 유대인인 것같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또 기독교에 오래 몸담았던 사람들이 스스로 영적 유대인이라고 한다든지, 영적으로 아브라함 자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자위하는 마음에 이 성경을 넘겨짚어서 이해하려고 달려드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유대인에게 상당히 가까워지려고 해 왔습니다.하지만 이 성경은 온전히 유대인에게 주어진 편지입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하는 이 말에서 “우리 조상”이 누구입니까?서기 1세기 이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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