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렇게 짓밟혀야 되는가’
사람들이 괴롭고 슬픈 일로 인해 희망을 잃어갈 때,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럴까’, 또는 ‘하늘도 무심하시지’ 하는 말을 흔히들 합니다. 여기 그 한 예로 하나님의 선민인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히틀러의 나치스 당원들 중에는 지식층도 상당수 있었는데, 그들은 유대인이면 자신들의 선배든 스승이든 가리지 않고 누구든지 색출하여 죽이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독일 본국뿐 아니라 인근 국가에서도 유대인 희생자는 엄청났다는 것입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얼마나 희생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수십 만이 사라져도 그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600만 명이 죽어간 이런 비참한 상황 속에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부하는 우리가 왜 이렇게 짓밟혀야 되는가?’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럴 수가 있을까?’ 하는 원망도 했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민족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유대 민족만의 대표적 특성을 든다면 그들은 근본부터 하나님과 직결된 정신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이와 같이 어처구니없게도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어느 책에서 읽었습니다. 저는 그 글을 읽고 ‘하나님이 계시니까 저렇게 당하는 것이다’ 하고 정반대의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20세기에 접어든 이후 매스컴은 유대인이 이렇게 희생당한 사건을 전세계에 신속히 알렸습니다. 그러나 약 2천 년 역사가 흘러오는 동안 유대인들이 유럽 각국에서 박해받고 또 엄청나게 희생되어온 사실들은 거의 모두 역사 속에 묻혀 있을 뿐입니다.
심지어 서기 천백 년 즈음 유럽에서 연합한 십자군들이, 가슴에 십자가를 달고 방패와 칼자루에 십자가를 새기고는 십자가 군병이라고 자부하면서 성지 탈환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소아시아를 건너서 팔레스타인 땅에 있는 예루살렘을 점령하기 위해서 행군할 때, 유대인 마을을 지나게 되면 마주치는 유대인들을 산 채로 우물 속에 빠뜨려서 돌로 덮어 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은 무참히 짓밟혔습니다.
그뿐 아니라 유럽 사람들은 ‘게토’라는 지역을 정해 유대인들을 그 곳에서만 거주하게 하고, 허가 없이는 함부로 못 나오게 했습니다. 지금도 유럽에 가면 그 게토의 흔적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유럽 전역을 여행하다 보면 유대인들이 박해받았던 흔적들이 종종 눈에 뜨일 것입니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대로 살펴보면 유대인의 고생과 수난은 다른 민족과는 전혀 다르게 주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원후 2천 년 유대 역사를 두고 생각해 봅시다. 예수께서 잡혀가시던 날 예루살렘의 많은 여인들이 울면서 따라왔습니다. 예수께서 잡혀가시는 것이 처량해 보여서 우는 그 여인들에게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했습니다. (눅 23:28)
그런가 하면 로마에서 보낸 총독 빌라도는 자기 부인이 ‘어젯밤 꿈에 괴로운 꿈을 꾸었으니 그 옳은 사람을 제발 다치게 하지 마십시오.’ 라고 충고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지위에 위협을 받자 예수를 처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때 빌라도는 “너희가 당하라” (마 27:24) 고 했습니다. ‘이 사람의 피에 대해서 나는 깨끗하다’ 하고 빌라도가 대야에 물을 떠서 손을 씻었을 때 유대인 군중들은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마 27:25) 라고 했습니다. 우리 속담 중에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예전에 했던 그 말대로 2천 년 역사가 흐르는 동안 각국에 흩어져서 그렇게 겪었습니다. 톡톡히 치르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민족적으로는 아직까지 예수가 그들의 메시아라고 생각하지 않으나 개인들은 예수를 믿으면서 많이 변하고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유대민족사를 놓고 볼 때 ‘메시아가 꼭 올 것이다’, ‘2천 년 전에 왔던 그 예수가 진짜 메시아일까’ 하는 기대와 의문들은 아직 결론이 내려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가르치실 당시에는 누구든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출교를 당했기 때문에 함부로 예수가 그리스도라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는 오로지 사형 대상으로만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런 유대인들이 20세기의 대박해 가운데에서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우리가 이런 수난을 겪어야 되느냐’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러한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그들을 뒤에서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 말씀이 있습니다.
에스겔서를 읽어보면 유대인들이 나중에 독립국가를 형성하게 될 것이라고까지 예언되어 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대로 갈라져서 흩어진 사람들이 나중에는 한 나라가 된다는 예언이 기록되어 있고, 지금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런 저런 많은 고난과 풍파를 겪은 후에 유대인들은 다져지고 굳어집니다.
그것을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을 통해서 읽으면서, 유대인들이 당했던 그 모든 것이 우리에게 큰 교훈이 된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나는 나고, 유대인은 유대인이다’ 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창조자이신 하나님은 인생을 그렇게 방관하시지는 않습니다.
본심이 아니시로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예레미야애가 3:33)
부모는 사랑하는 자식이 잘못했을 때 매를 듭니다. 성경에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잠 13:24) 라고 했습니다. 나라마다 교육에 대한 법에 차이가 있겠지만 이상적인 법이라면 부모가 교훈을 위해서 사랑하는 자녀를 초달(楚撻)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생이 고생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은 아니라는 결론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고난을 겪고 괴로워하며 ‘왜 이럴까?’ 하고 해답을 찾다가, 어느 때에 가서는 자기 행위를 조사해보고 마침내 스스로 돌이켜서 ‘아, 이래서는 안되겠구나.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라고 결론짓도록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예레미야애가 3:40-41)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어떤 방법을 가르치고 설명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가자
한참 자랄 때 아이들은 부모님께 벌을 받거나 야단을 맞으면 훌쩍 집을 나가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또 너무 공부하라고 재촉하면 그것조차 간섭받기 싫어서 친구 집에 가서 돌아오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부모님은 아이를 찾느라고 애를 먹습니다.
제게도 그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일입니다. 동네 아이들이 우리 집 마당에 와서 소꿉장난을 하고 있었습니다. 엄마들 쓰던 크림뚜껑 등 별것 다 갖다 놓고 밥 해놓은 것같이 해서 먹는 체하고, 또 국도 만든 것같이 해서 서로 아빠 엄마 하며 놀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지켜보던 저는, ‘너희들, 조금 기다려라’ 하고 부엌에 가서 쌀을 큰 그릇에 담아오고 커다란 냄비도 가져 왔습니다. 마당 한가운데다 정원에 있던 돌을 몇 개 가져다 쌓고 거기에 냄비를 올려놓고 쌀을 씻어서 부어놓고는 물 넣을 때 엄마가 하던 대로 손을 넣어 손목 못 미치게 물을 재서 뚜껑을 덮고 불을 땠습니다. 먹는 체 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진짜 그렇게 하니까 아이들은 좋아서 구수한 냄새를 맡으며 기다립니다.
이제 밥이 거의 다 되었습니다. 쌀이 잔뜩 불어나서 냄비뚜껑이 푹푹 올라오는 것을 보고 좋아들하고 있었습니다. 숟가락도 부엌에서 가져와서 이제 퍼먹기 직전인데, 앗, 갑자기 어머니가 마당 입구에 들어서시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쌀을 훔쳐온 것도 아니고 집에 있는 것 그냥 쓴 것인데 그때서야 ‘내가 일을 저질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혼비백산이 되어서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가 따라오셨습니다. 그래서 더 멀리 도망을 쳤습니다. 멀리 멀리 도망을 쳐서 남의 동네까지 갔어요.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맸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끝까지 따라오셨습니다. 해가 졌습니다. 발자국 소리가 들리나 하고 귀를 기울이니 어머니가 집으로 가시는 모양이었습니다. 저도 멀찌감치 떨어져서 살금살금 뒤따라갔습니다. 밤이 늦었습니다. 점심, 저녁 다 굶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집에 들어가서 한 대도 맞지 않았습니다.
며칠 지난 후에 왜 그랬느냐고 어머니가 제게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죽 말씀드렸더니 “그럼 말을 할 것이지.”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어머니는 왜 나를 따라왔습니까?” 하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너 잃어버릴까봐 끝까지 따라갔다.” 그것이 어머니의 대답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생각의 차이가 너무 컸던 것입니다. 저는 매맞을까봐 달아났고. 어머니는 내가 걱정이 되어서 계속 따라오셨던 것입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성경을 읽으면서 그때 생각이 났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사 55:8-9)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믿게 된 후 22살 되던 해 어버이날에 예배당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작은 소녀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높은 게 또 하나 있지 낳으시고 기르시는 어머님 은혜푸른 하늘 그보다도 높은 것 같애
그 노래를 들으면서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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