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근본되는 것
사람은 각자의 생활 환경에서 부지런히 노력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 삶에 대한 애착으로 이 세상에서의 생존경쟁을 견디어 내며 자신의 터전을 마련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노력하는 사람들에 비해 인생으로서는 많이 약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만약 사람의 외형적인 모습을 보고서 서열을 정한다면, 저 자신은 아주 낮은 위치에 있을 거라고 짐작해봅니다. 키는 다른 사람보다 작고, 생김새도 그리 모양 좋게 생기지 않았습니다. 나무로 말한다면 아주 오래된 고목이요, 곡식으로 치자면 추수 직전에 있는 곡식입니다. 나이도 다른 사람에 비해 많이 들었습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 악기 한 두 개 정도 다루고 연주할 줄 아는 사람들, 노래 잘하는 사람들을 볼 때에 내가 남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 생각 중에도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은 사람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는가 입니다. 우리나라에 몇 년간 계속 가짜 박사가 증가하고 있다는 뉴스를 보면서 생각한 것은 무엇이 좋다고 저렇게까지 할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회적인 명예욕에 사로잡혀 인간 스스로의 자존심도 없이 박사라는 가짜 탈을 쓰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남에게 인정받기보다는 비록 다른 사람에게 인정은 받을 수 없다 하더라도 내 삶에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지식을 배우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 지식은 단순히 수학 공식이나, 역사 혹은 과학, 철학 같은 지식이 아닙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잠 1:7) 하는 말씀처럼, 우리 인생이 여호와를 알고,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는 삶에는 성경에 약속된 평화와 평안이 영원히 함께 합니다. 그 영원한 평화가 사람 마음 속에 주어지지 않았다면 인간은 무엇을 해도, 어느 지위에 있다 해도 불행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 중에는 ‘이 세상에서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하고 고생한다 하더라도 죽어서 저 천국에 가서 평안할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위로하며 사는 사람 많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불안, 초조, 불평, 불만인 인생을 살고 있으면서 죽은 후에는 천국 가서 평안할 것이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고전 15:19) 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행 16:31) 한 말씀 속에는 우리 영혼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구원은 죽은 후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날 구원하신 예수를 영원히 찬송하겠네 (찬송가 196장)
여기서 ‘구원’이라는 말은 현재 완료형으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 예수께서는 확실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 믿는 모든 사람들의 최고의 자랑입니다.
무얼 채워야 행복한가?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잠시 잠깐 머물 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인생들은 그 속에서 너무 큰 기대와 욕심을 갖고 많은 것을 갖고 싶어합니다.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어하죠. 사람들은 행복을 좇아가며 살면서 ‘행복은 저 너머에 있다.’ 라고들 말합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행복하고 싶어하는데도 불구하고 행복이 항상 저 너머에 있다면, 행복은 추구하려다 마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사람은 너무 불쌍하지 않습니까?
우리 생에 있어서 부(富)를 이루거나, 지위가 생기면 행복이라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 행복은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분명히 사람에게는 행복의 조건과 이유와 확신이 있습니다. 그것이 없이는 절대로 사람에게 행복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저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낙을 누리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 (전 6:6) 하는 말씀처럼, 낙을 누리지 못하면 그 사람이 갈 곳은 결국 바깥 어두운 곳일 뿐입니다. 사람의 양심 속 깊은 곳에서는 ‘이것이 다는 아닌데…’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 세상에 오래 산 사람도 ‘내가 이만큼까지 살았으니 이제 죽어도 되겠다.’ 하는 생각을 가질까요? 더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이 있을 것입니다. 그 오래 살고 싶어하는 욕망, 마음속에는 막연하게 영원을 추구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전 3:11) 하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사람은 자기 영혼 속에 무엇인가를 채우려고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 중에 가장 분명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직업이나 지위 고하에 관계없이 우리 인간의 주인이신 창조자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 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것을 모르고 살다가 이 세상을 마치면 그 사람은 종교인이든 아니든 불행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평화와 행복이 우리의 마음 속에 생긴다는 것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얻은 돈과 명예, 지식 그 무엇으로도 쟁취할 수 없는,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딱 한가지뿐입니다. 이 평화는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것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채워야
몸에 병이 있던 사람이 병을 고쳤다고 해서 영혼의 병까지 고친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인생은 강한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불행하고 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잡한 세상 지식을 얻기 위해 시간을 보내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으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불행의 요인입니다. 이런 인생들에게 하나님께서 행복을 주시기 위해 성경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성경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지 우리는 꼭 알아야 합니다.
어떤 가정의 아이가 고민에 빠졌을 때에 부모의 한 마디는 큰 위로와 힘이 되기도 합니다. 그와 같이 우리 인생이 어떤 고민에 휩싸여 영혼의 것을 갈망할 때에 성경은 우리에게 큰 힘을 줍니다. 성경이 한 이야기를 우리 자신이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 성경이 우리 손에 쥐어질 때까지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조선 시대에 성경책이 들어올 때에도 성경책 전체가 들어온 것이 아니라, 낱권으로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 시절에 토마스 목사가 우리나라에 선교하러 왔을 때도 성경책을 가지고 오다가 포졸들이 배에 불을 질러서 그는 성경책을 다 물에 던지고 마지막 남은 성경책 한 권만을 들고 배 밖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포졸들에게 성경책을 건넨 후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 성경책을 받은 사람이 성경책을 읽고 예수를 믿게 되었고, 평양에 복음이 많이 전해졌다고 합니다. 이렇게 이 성경이 우리들 손에 들어오기까지는 무척이나 많은 사연이 있습니다.
어릴 때 불렀던 찬송가가 생각납니다.
귀하고 귀하다 우리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재미있게 듣던 말 이 책 중에 있으니 이 성경 심히 사랑합니다 (찬송가 234장)
이 찬송가는 제가 어릴 때 많이 불렀던 성경에 대한 찬송가입니다. 불행하게도 그때는 제가 성경을 잘 몰랐던 때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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