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를 읽으면서 74회마태복음 19:1-12마가복음 10:2-122002. 8. 24. 강연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에서 떠나 요단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 큰 무리가 좇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저희 병을 고치시더라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제자들이 가로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마태복음 19:1-12)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이 내용은 쉽게 생각하면 쉽지만 조금 생소하고 어려운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 사이에 생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벽이 생겼다, 금이 갔다 하는 정도가 아니라 서류상으로 결혼이 파괴되는 문제가 논의되고 있습니다. 이혼 증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나 가정을 잘 지키는 사람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누구나 다 한 번은 생각해 보아야 할 내용입니다.그런데 먼저 어떤 사람이 예수께 와서 가정 내의 문제에 대해 물었을 때, 예수께서 아주 단호하고 냉혹하게 답변을 거절하셨던 일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유산을 제대로 나누어 주지 않고 세상을 떠나 그 재산을 맏아들이 다 차지한 것 같습니다. 그러자 동생이 예수께 찾아와 “우리 형으로 나와 재산을 좀 나누게 해 주십시오.” 하고 부탁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고 그 일은 자신과 상관없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눅 12:13-15 참조) 보통 사람 같으면 형과 동생을 불러서 형에게는 양보하라고 하고 동생에게는 과한 욕심을 부리지 말라고 잘 타일러서 좋게 좋게 해결해 주었을 텐데, 예수께서는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으로 세웠느냐? 재산 분배하는 자로 만들었느냐?’고 하시며 아주 단호하고 냉정하게 잘라 버리셨습니다.비슷한 이야기가 우리 옛이야기 중에도 있습니다. 서울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행주산성 앞의 한강이 굽이치는 곳에 김포 들판이 있는데, 한자로 ‘금포(金浦)’입니다. 그곳 지명에 ‘금(金)’이 들어가게 된 데에는 유래가 있습니다. 고려 말에 두 형제가 금덩이를 하나 주워 들고 나룻배를 타게 되었습니다. 형제는 금덩어리 때문에 형제간의 의가 상하게 될까 봐 걱정을 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형은 금덩어리를 물에 던져 버렸고, 서로 의좋게 살았다고 합니다.하지만 저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형도 바보고 동생도 바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라면 형이 금덩어리를 물에 던져 버렸더라도 빠뜨린 위치를 기억해 두었다가 밤중에 그곳으로 가서 금덩어리를 건져 냈을 것입니다. 그리고 금덩어리를 형과 나누었을 것입니다. 그래야 ‘잘 살았단다.’가 되지 않겠습니까?또 흥부와 놀부 이야기도, 저는 어려서 그 이야기를 듣고는 비판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욕심 많은 형님은 전 재산을 다 끌어안고 사는데 동생은 자식들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너무너무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쌀을 좀 얻으러 갔다가 욕심 많은 형수에게 밥주걱으로 뺨을 맞자 뺨에 묻은 밥알을 떼어 먹을 정도였습니다. 제게 있어서 흥부는 매력 없고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반면에 놀부는 다리를 치료해 주었던 제비가 물어다 준 박씨로 금은보화를 얻었다는 흥부의 이야기를 듣고 제비 다리를 부러뜨렸습니다. 제가 보기에 놀부는 어떻게 되는가 하고 살펴보았던 사람이지 단순히 욕심만 많았던 사람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그랬기에 저는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신 예수님의 대답에 대해 예수님이 냉정하게 참 잘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남편과 아내 사이의 문제에 대해 왜 그렇게 간섭하셨는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 문제는 가정이 깨어지느냐 마느냐 하는, 한 사람의 생애가 달린 문제입니다. 또 어느 총각이 평생을 결혼도 안 하고 늙을지도 모르는 문제까지 끌어내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말씀 끝에는 받을 만한 사람은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문제가 오늘날 우리들과 어떤 관계가 있겠습니까? 이 마태복음 19장의 내용은 금슬 좋은 부부는 읽을 필요가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성경은 누구에게든 다 필요하기에 아무리 금슬 좋은 부부라도 함께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 집안이 깨질 위기에 있는 사람도 같이 보아야 하는 말씀입니다.그런데 이 말씀을 하실 당시에는 유대인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는 이런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율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1,400년 동안 계속해서 따랐던 율법에는 아내를 내어 보낼 일이 생기면 이혼 증서를 써 주라고 하는 내용이 명확히 주어져 있었습니다. (신 24:1 참조) 율법이 없던 시대에는 아브라함도 아내가 여럿이었고 야곱도 아내가 여럿이었습니다. 그렇게 역사가 이어져 내려오다가 모세 때 법이 정해졌습니다.마태복음에는 이 문제가 완전히 남자 위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여성들이 이혼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은 그런 것이 통하는 시절입니다. 다른 성경에도 그런 내용이 있는지 찾아보니 믿지 않는 남편이 함께 살지 않기를 원하거든 그 남편과 갈라서도 된다는 기록이 고린도전서에 있었습니다. (7:15 참조) 상대를 버릴 수 있는 권한이 믿는 여성에게도 주어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 마태복음에는 그런 표현 없이 유대인 남자를 위주로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마태복음을 읽다 보면 유대인이 아니라면 납득하지 못할 이야기들이 종종 있습니다. 사람의 숫자가 나올 때는 “여자와 아이 외에” (마 14:21, 15:38) 하는 구절과 같이 꼭 여자가 제외됩니다. 이런 것을 보아도 남자 위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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