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온 유리스
5편 독수리의 날개를 달고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이사야 40:31)
1장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유대인들의 이민 행렬은 끊이지 않았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라크나 터키의 산골 마을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부터 3천 년간 바깥 세계와 접촉을 갖지 않은 채 오로지 호라와 계율을 지켜온 예멘의 유대인들까지 이민의 행렬은 이어지고 이어져 프랑스,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그리스, 스칸디나비아 등지에서도 약속의 땅, 이스라엘을 찾아 갖은 고초를 겪으며 돌고, 돌아왔다.
물방울은 개울이 되고 개울은 바다가 되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이민의 물결로 이스라엘의 인구는 곧 2배가 되고 또다시 3배로 불어났다. 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된 이스라엘의 경제는 밀려드는 이민의 홍수에 휩쓸려 더욱 어려워졌다. 몸에 걸친 것 하나만으로 이스라엘에 온 사람도 많았고, 노인들, 허약한 사람과 문맹자도 많았다. 그들은 갖가지 생활 환경에서 지내다 세계의 구석구석에서 몰려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상황에서 지냈든, 마음속에 어떤 부담을 가져왔든 이스라엘의 문 앞에서 쫓겨 난 유대인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동안 내내 짓밟히기만 했던 그들이 이스라엘 땅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는 생전 처음으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자유가 주어졌다. 이같은 권리는 인류 역사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추진력과 목적의식을 심어 주었다.
매일 농업부락이 새로 생겨났다. 이민자들은 초기 개척민이 열성을 갖고 습지를 개간했던 것처럼 열성을 갖고 황무지와 사막을 상대로 싸웠다.
크고 작은 도시들이 갑자기 땅에서 솟은 듯이 생겨났다.
남아프리카 연방과 남미, 캐나다 등지에서 온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산업 부흥을 위해 돈을 쏟아 부었다. 공장이 하나 둘 세워지기 시작했고, 곧 이스라엘의 공업 생산력은 근동 일대에서 최고의 수준이 되었다. 과학, 의료, 농업 분야의 연구는 높은 단계에 이르렀다. 철근 콘크리트 자재의 고층 건물이 우후죽순처럼 솟았고, 교외 지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망치질 소리, 천공기의 소리, 콘크리트 혼합기의 소음, 용접기 소리 등은 이스라엘에서 한시도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다.
텔아비브는 인구 25만의 번화한 대도시로 발전했고, 하이파는 지중해의 주요 항구로서의 위치를 확보했다. 이 두 도시를 기반으로 중공업이 탄생했다. 자동차가 조립되고 버스가 제작되었다. 타이어가 생산되고, 비행장과 도로망이 건설되었다. 신생국가의 수도이며 교육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은 주변의 산 위에까지 확장되었다. 이 땅에는 거대한 신흥도시의 기풍이 만연했다.
예술 분야의 발전도 꽃을 피웠다. 헤르츨 거리와 알렌비 도로에는 책 가게가 즐비하게 들어섰고, 10개국의 언어로 된 서적이 서가에 차 있지 않은 키부츠와 모샤브는 없었다. 이 힘찬 새 사회를 음악가는 멜로디로, 화가는 그림으로, 작가는 문장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그 힘찬 사회에서의 삶은 잔인하리만큼 고되었다. 이스라엘은 메마른 땅이기 때문에, 작은 전진을 위해서조차 피땀을 흘려야만 했다. 노동자들은 쥐꼬리만한 보수만을 받고, 장시간의 고된 노동을 견뎌냈다. 특히 농업부락에서 토지를 일구느라 씨름하는 농부들은 말할 수 없는 역경을 견뎌내야만 했다. 이스라엘의 시민들은 모두 새로 들어오는 이민자들을 위한 비용을 부담해야 했기 때문에 감당키 어려운 세금을 냈다. 그들은 모두 피와 땀으로 자신들의 작은 나라를 조금씩 키워 갔다.
이스라엘에서는 그 누구도 자기만의 평생의 향락을 위해 일하지 않았다. 그들이 하는 모든 것은 내일을, 자손들을, 새로 들어오는 이민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굴복을 모르는 젊은 사브라 세대는 유대인으로 태어났음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기는, 새로운 세대로 등장했다.
이스라엘은 인류 역사상 찬란한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이스라엘 국토의 절반이 네게브 사막이었다. 그곳은 대부분이 불모의 땅이었으며, 달의 표면을 닮은 거친 지역도 있었다. 이곳이 바로 모세가 약속된 땅을 찾아서 헤매던 신의 황야였다. 한없이 뻗은 점판암의 들과 깊은 골짜기 위로 120도의 살인적인 열이 내리쬐는 헐벗은 황야였다. 몇 마일씩 뻗은 암석의 들판에서는 풀 한 그루도 자라지 못했다. 생명체라고는 새조차도 들어올 생각을 못하는 곳이었다.
그러한 네게브 사막은 이스라엘의 정복 대상이 되었다. 이스라엘인들은 이 사막으로 꾸역꾸역 몰려들어왔다. 그들은 무자비한 더위 속에 살면서 바위 위에 마을을 건설했다. 그들은 모세가 했던 대로 바위에서 물을 뽑아냈고, 생명체를 자라게 만들었다. 그리고 짧은 시간에 사막에 고층 건물이 생기게 했다.
이스라엘은 네게브 사막 지역에서 아카바 만 남쪽에 있는 에라스에 가장 큰 희망을 걸고 있었다. 해방 전쟁 말기에 이스라엘군이 처음 에라스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흙집 두 채만이 있을 뿐이었다. 아리 벤 카난 대령은 해방 전쟁이 끝나자 네게브 사막에서의 근무를 자원했다. 삼면이 이집트,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등 적국에 둘러싸인 이 중요 지역을 샅샅이 조사하라는 임무가 그에게 맡겨졌다.
아리는 부대를 인솔하여, 인간이 다닐 만한 곳이 못되는 점판암으로 펼쳐진 벌판과 개울자리를 돌아다녔다. 그는 세계 어느 나라의 군대로서도 흉내 낼 수 없는 혹독한 훈련법을 고안해냈다. 장교 후보생들은 전원 아리 휘하로 파견되었고, 그들은 인간이 감내할 수 없을 정도의 거친 육체적 시련을 겪었다. 아리의 부대는 ‘네게브의 야수들’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스라엘군에는 용감한 업적을 치하하는 훈장이 없었다. 누구나 다 같은 용맹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네게브의 야수 출신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훈장을 단 것같은 경이의 시선을 받았다. 아리의 본거지는 에라스에 있었다. 흙집 두 채가 있을 뿐이던 에라스는 2년 안에 소도시로 바뀌었다.
키티는 해방 전쟁이 끝나자 이민 관련 업무에 뛰어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온 이민협회의 분쟁 조정자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비행기로 유대인들을 이스라엘까지 실어 나르는 ‘마법의 양탄자 작전’이 시작되자 키티는 간 다프나를 떠나 아덴으로 가서 하셰드 캠프의 아동 수용소의 의료반을 설치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키티는 뛰어난 재능으로 맡은 직책을 잘 다루어, 혼돈 속에서 질서를 잡아갔다. 몇 달이 안 되어 키티는 시온 이민 협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인재가 되었다. 이민자들이 밀려드는 곳마다 쫓아 각지를 다녔고, 절차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럽 각지를 돌아다녔다. 이민의 홍수가 한 고비를 넘기자 예루살렘으로 불려 들어가 청년 아리아 역원으로 임명되었다.
어린아이들의 입국을 돕던 키티는 이제 아이들이 이 땅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왔다. 나이가 찬 아이들은 육군으로 편입되었고, 새로 온 아이들의 적응을 돕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간 다프나에서 돌보던 아이들은 어느덧 자라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데리고 키티를 찾아왔다.
키티는 청년 아리아의 기구가 확대되어 비상시에 대비할 수 있게 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키티는 시련이 많던 청년 아리아의 초창기부터 원활한 기능을 발휘하는 조직체로 성장할 때까지 행정조직과 인원 훈련 면에서 충실히 도왔다. 이제야 키티는 자기 할 일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영영 이곳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2장
바락 벤 카난은 여든다섯 번째의 생일을 맞이했다.
그는 공직에서 은퇴한 후 야드 엘에서 농장을 돌보는 만족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가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중에도, 반세기 동안이나 무척 그리워해 온 생활이었다. 노령이 되었어도 바락은 활기에 차 일을 해나갔다. 그는 언제나 맑은 정신을 지녔고, 또 밭에서 누구 못지 않는 노력을 발휘할 수 있는 체력을 갖고 있었다. 엄청나게 큰 수염은 이제 거의 다 흰색으로 변했지만 그래도 간간이 붉은 색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의 힘은 예나 다름없이 억세었다. 해방 전쟁이 끝난 후 몇 해 동안은 지극히 만족스러운 세월이었다. 그도 마침내 자기 자신과 사라만을 위한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느끼는 이 행복에도 한 가닥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그것은 요르다나와 아리의 불행이었다. 다비드의 죽음은 요르다나에게 큰 아픔을 가져다주었고, 요르다나는 그 아픔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의미 없는 행동을 하며 초조한 나날을 보냈고, 한때는 갑자기 파리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몇 차례 다른 남자들을 만나보기도 했지만 그들은 모두 요르다나에게 실망만을 안겨 주었다. 마침내 요르다나는 다비드가 사랑해 마지않던 예루살렘으로 가서 대학에 다녔으나, 공부마저도 요르다나를 안정시켜주지는 못했다. 아리는 네게브 사막에 숨어 버렸다. 바락은 아들이 멀리 떠난 이유를 잘 알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아리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고 자신을 혹사시키고 있었다.
85회 생일이 지난 후 얼마 되지 않아 바락은 복부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여러 주일 동안 그 사실을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벤 구리온으로부터 이스라엘 독립 3주년 기념일에 사라와 함께 하이파로 와서 사열대에 서지 않겠느냐 하는 서신이 왔다. 보기 드문 일이라 바락은 영광이라 여기며 가겠다고 약속했다. 하이파에 도착한 후, 바락은 확실한 건강진단을 받기 위해 병원으로 갔다.
“의사가 뭐라고 하던가요?” 사라의 물음에 바락은 웃었다.
“소화불량에 노쇠라고 합디다. 약을 받아 가지고 왔어요.”
“약이라니요?”
걱정이 된 사라가 더 캐물으려고 했다.
“여보, 이러지 말아요. 우린 독립 축하를 위해 이곳에 온 것 아니오.”
바락은 사라의 입을 막았다.
하루 종일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하이파로 몰려들었다. 다른 사람의 차를 얻어 타고 오는 사람, 자기 차로 오는 사람, 비행기로 오는 사람, 기차로 오는 사람 등 가지각색이었다. 하이파는 이스라엘 각지에서 밀려든 사람 때문에 미어터질 지경이 되었다. 사람들은 온종일 바락이 묵고 있는 호텔로 인사하러 찾아왔다.
저녁 무렵 청년단의 횃불 행진을 시작으로 축하 행사의 막이 올랐다. 바락과 사라는 우레 같은 갈채를 받으며 무개차를 타고 행진을 했다. 사열대 위에 대통령과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고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들처럼 기치를 받들어 든 새 이스라엘의 아들딸들이 바락 앞을 지나갔다. 자랑스러운 용사가 된 예멘계 사람들, 키 큰 사브라의 남녀들, 남아프리카와 미국에서 온 비행사들, 전 세계에서 모인 전사들이 뒤를 이어 지나갔다. 붉은 베레모의 정예 낙하산 부대와 녹색 군복을 입은 국경 수비대가 지나갔다. 전차대가 지축을 뒤흔들면서 지나가고, 비행기 편대가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사람들의 머리 위를 지나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의 환호성은 더 커졌다. 그때 수염이 덥수룩한 네게브의 야수들이 자신들의 지휘관 부친에게 경례를 하면서 지나갔다.
행진 후에 연설과 연회와 축하 행사의 모임들이 계속 이어졌다. 이틀 후 바락과 사라가 야드 엘로 돌아가려 할 때에도 거리에서는 춤을 추는 사람들이 있었다.
야드 엘의 집에 돌아온 바락은 그동안 참았던 고통을 한꺼번에 쏟아내 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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