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를 읽으면서 65회마태복음 15:32-16:12마가복음 8:1-212002. 6. 1. 강연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우리는 사람들을 대할 때, 얼굴이나 모습과 같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 속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이야기들이 흐르고 있습니다. 과거 이야기, 삶에 대한 이야기,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 읽은 책에 대한 이야기 등 많은 것이 한 사람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겉모습만으로는 그런 것을 볼 수 없습니다.하지만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은 인간의 속을 들여다보십니다. 성경을 보면 “그 생각을 아시고” (마 9:4)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음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말씀을 읽을 때면 ‘하나님께서 우리 속을 다 아시는데 그분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성경에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신 17:19) 고 했으니, 그것이 우리에게 생활화되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그것을 망각하고 소홀하기 쉽습니다.언젠가 세상을 떠날 때 내 기억 속에, 내 생각 속에 무엇이 남아 있겠습니까? 무엇이 나를 채우고 있겠습니까? 살면서 보았던 TV 드라마나 읽었던 문학 전집 같은 것들로 내 속을 채우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속에 있는 영혼을 보시는 분이시니, 우리 안에 있는 것이 그런 것들뿐이라면 성경대로 지적을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데 있어 무엇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앞서 읽은 성경 내용은 전에 예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던 일 (마 14:15-21 참조) 과 비슷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읽다 보면 예수님과 우리의 생각은 그 관점이 다르지 않는가, 나는 예수를 어떻게 생각했는가, 우리가 생각하는 예수는 어떤 분인가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그저 단순히 어느 명화나 성화에서 본, 장발에 구레나룻과 수염이 있고 긴 옷을 입은 예수를 떠올리십니까? 성경에는 예수께서 그렇게 멋스러운 분이었다는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그는 …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53:2) 라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추남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추남인지 미남인지, 이렇다 할 단서가 성경에 없습니다.다만 우리 속을 다 아시는 그분의 생각은 이 땅 위에 있는 모든 사람의 생각과는 아주 달랐습니다. 그분은 구약성경에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사 55:8-9) 고 한 선지자의 말처럼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분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어느 날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40일간 굶주린 상태에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사탄의 말을 들었습니다. 사탄의 말에는 조건이 붙어 있었습니다. 사탄은 예수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고 했고, 또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예수께 보이면서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셨습니다. 또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고,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하시며 사탄에게 굽히지 않으셨습니다. (마 4:1-10 참조)예수님의 그러한 자세가 아니었다면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 열릴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와 인류의 조상 아담이 섰던 자리는 아주 달랐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은 아름답고 좋은, 길이길이 살고 싶은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는 낙원에서 시험을 받았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가시와 엉겅퀴밖에 없는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아담이 범죄한 후 쫓겨난 세상은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창 3:18) 하는 말씀대로 되었기 때문입니다. 극과 극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불행한 인생의 모습을 보여 주는 청사진입니다. 이러한 광야에서 태어난 인간을 위해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모든 인간은 갈 바를 모르고 삽니다.이 광야 같은 세상에 늘 방황할 때에 (찬송가 471장 십자가 그늘 밑에)인간의 생애를 아주 적나라하게 표현한 노래가 아닙니까? 광야로 쫓겨난 아담의 피를 이어받은 모든 인생은 광야 같은 세상에서 길을 찾으며 허덕이다가 삶을 마치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세상에 오셔서 마귀에게 직접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굶주림을 겪는 중에는 떡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권능이라면 돌들로 능히 떡이 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사탄의 말대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길을 열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그 길이 어떤 길입니까? 내 한 몸 먹고사는 길이 아닙니다. 우리 영혼이 살아야 할 길, 즉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요 6:48) 하신 예수님의 길입니다. 굶주린 우리 영혼을 먹이시려고 오신 그 예수님의 길입니다.우리는 성경에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에 대한 이야기를 익히 읽어 보았고 관련된 설교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때는 제자들이 사람들을 걱정하여, 돈을 조금씩 걷어도 부족하니 차라리 사람들이 동리에 나가서 사먹게 하자고 의논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 와서 여쭈었더니 예수께서는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다 아시는 예수께서 빌립을 시험코자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때 그곳 사람들에게는 잔디가 깔린, 쉴 만한 좋은 자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서 읽은 내용에는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납니다. 다른 곳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때는 예수께서 무리를 보고 걱정하셨습니다.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마태복음 15:32)‘저희가 나와 같이 있은 지 사흘이다. 굶겨 보내지 못하겠다.’ 하신 말씀에는 예수님의 근심과 걱정이 담겨 있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을 동정의 눈길로 보셨습니다. 사람들을 보는 남다른 그분의 시선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가로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의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마태복음 15:33)이때 사람들은 푸른 풀밭이 아니라 메마른 광야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한껏 걱정에 휩싸였습니다. 예수의 근심과 제자들의 근심에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 예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실 때는 제자들에게도 어떻게 해야겠다는 이런저런 구상이 있었지만, 이때는 콱 막혀서 일을 분간하지 못할 지경이 되어 할 말도 잊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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