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를 읽으면서 52회마태복음 13:3-232002. 2. 16. 강연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마태복음 13:3-23)귀 있는 자는 들으라이 말씀은 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씨는 하나님 말씀이라고 이미 답이 나와 있습니다. (눅 8:11 참조) 예수께서는 왜 하필이면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셨을까요. 농사를 지어 보신 분들은 씨를 심으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농사꾼은 아니지만 저도 씨에 대해서 조금은 압니다. 민들레 씨앗들이 하얀 솜처럼 바람에 날려서 가는 것도 보았고, 꽃씨도 심어 보았습니다. 여러 종류의 씨를 여러 방법으로 심었지만 거의 다 실패했습니다. 감 씨도 심어 보았는데, 감 씨에서 싹이 조그맣게 자라는 것까지는 보았지만 방법이 잘못되어 그런지 잘 자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 성경을 보니 이해가 되었습니다.예수께서는 씨가 길가에 떨어지거나 돌밭에 떨어졌을 때, 또 가시떨기 위에 떨어졌을 때 어떻게 되는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목수이지 농사꾼이 아닌데 왜 농사짓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셨을까요. 이 내용은 농사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씨가 어떤 장소, 어떤 토양에 심겼느냐에 따라 얼마나 잘 자라는지가 결정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요 3:16) 한 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죽으러 오셨다는 것은 사람들이 다 아는 내용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혹은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성경을 보았거나 들었던 사람들은 다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 예수께서 씨 뿌리는 이야기를 하실 때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실없이 사람들에게 그저 씨를 어디에 뿌리고, 어떻게 하면 잘 자란다는 이야기를 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왜 씨를 뿌렸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분명히 예수께서는 이유를 밝히고 계십니다.다변화된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이 이야기가 나와는 상관없다고 할 사람도 많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가 왜 필요한가? 배를 타고 바다에 떠 계시면 바다 이야기를 하셔야 될 텐데, 왜 하필이면 길가에, 돌밭에 씨 뿌리는 이야기를 하셨을까?’ 등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그런데 씨에 대해 생각해 보면,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생각이 먼저 듭니다. 어릴 때 동화책을 읽다가 웃은 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날콩을 먹었더니 비리고 맛이 없었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콩을 볶아 먹어 보라고 해서 그렇게 했더니 고소하고 맛이 좋았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이렇게 고소한 콩을 키워야 되겠다고 생각하고는 볶은 콩을 밭에 심어 놓고 자라기를 기다렸지만 아무리 물을 주고 기다려도 싹이 나오지 않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모양은 같을지라도 불의 기운이 그 씨앗을 거쳤기 때문에 씨는 이미 죽었습니다. 생명이 나가 버렸기에 힘이 없습니다. 그 생명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달걀에도 유정란과 무정란이 있습니다. 유정란에는 씨눈이 있습니다. 삶아서 보면 점같이 작아서 보일까 말까 할 정도입니다. 달걀의 노른자와 흰자는 그 씨눈 하나를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씨눈이 자라 병아리가 되는 데 양식이 됩니다. 씨눈이 없는 무정란도 유정란과 모양은 똑같습니다. 다만 생명이 있고 없고의 차이뿐입니다.예수께서는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씨가 얼마나 좋다든지, 어떤 씨라든지 하는 것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씨는 하나님 말씀”이라고 간단하게 이야기하셨습니다.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3:3-9)세상에 귀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두 개씩 귀를 가지고 있으니, 누구에게나 들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문제는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신 이 말씀에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귀는 귓바퀴 달린 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귀에는 생각과 마음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떤 귀는 얌전한 것 같지만, 어떤 귀는 아주 눈치가 빠릅니다. 귀는 감정을 가지고 있고 의심도 합니다. 귀에 구멍이 뚫려 있고 귀 안에 귀청이 있으니 그저 듣기만 하는 것 같지만, 누가 문을 똑똑 두드리면 열어 주듯이, 귀도 누가 말을 하면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성경을 보면 스데반이 사람들에게 맞아 죽을 때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행 7:51) 라고 이야기한 내용이 나옵니다. 마음과 귀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며 거기에 변화를 받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신 것은, 아무 귀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특별히 배우지 않아도 소리를 식별할 수 있습니다. 여름에 매미가 울면 ‘아, 저것은 매미 소리다.’ 하고 알고, 또 어떤 가느다란 소리가 들리면 ‘저것은 쓰르라미 소리다.’, ‘여치 소리다.’ 하고 압니다. 제가 옛날 어느 지방에 가서 한밤중에 ‘찌이’ 하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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