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회 성경탐구모임 2004년 7월 30일 저녁
돌아가야 할 우리 인생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두 종류의 사람을 들어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은 부자였고, 한 사람은 거지였습니다. 부자는 이름이 없고 거지는 나사로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나사로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나를 도우신다’는 뜻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스폰서’, 또 달리 말하면 ‘보호자’ 그런 뜻일 것입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이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라고 말한 대로 재산이 많았고, 그것으로 풍족하게 누리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부자와 나사로, 이 두 사람은 세월을 다 보낸 후에, 세월이 이들을 더 데리고 있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영원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영원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가 다시 시작됩니다.
이 둘 중 한 사람은 가난했고, 한 사람은 부자였습니다. 이 이야기가 단순히 부자였기 때문에 지옥에 갔고, 가난했기 때문에 천국에 갔다는 내용일까요? 아니면 이 이름의 뜻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한 사람은 하나님께 대해 부요한 마음이 없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갖고 만족하며 살았던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오직 ‘하나님이 자기를 돕는다’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이 사람은 물질 세계에서 얻은 만족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얻은 힘으로 세상을 살다가 갔습니다.
우리는 이 내용을 읽을 때마다 ‘아, 부자는 다 지옥에 가는구나. 가난하면 천당에 갈 수 있구나’ 하고 잘못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혹 그럴 수도 있기는 합니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돈 쓰는 재미에 빠져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낙을 누리고, 가난하면 ‘이 구차한 세상에 더 오래 살아 봤자 역시 가난뿐일 텐데 하늘나라에나 가서 잘 살아 보자.’ 하고 신앙을 갖는 사람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 내용을 곰곰이 살펴보면, 빈부의 격차와는 관계없이 그냥 넘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 두 사람이 세상을 마치고 둘 다 장사되었습니다. 부자의 장례식은 아마 굉장했을 것입니다. 물론 부자라고 해서 이 세상에서 죽을 때 장례를 잘 치르게 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아무리 부잣집 아들이고, 아무리 출세해서 장군이 되었다 하더라도 전쟁에서 싸우다 폭탄 맞아버리면, 장례고 무엇이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장례 모습이 좋고 나쁘고에 따라서 부했다, 가난했다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목숨은 젊다고 해서 오래 유지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암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문병 갔던 사람이 암 환자보다 교통사고로 먼저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나이가 많고 적은 것은 죽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기차가 달리는데 중간, 중간 역에서는 젊은이, 아이 할 것 없이 목적지에서 내리는 것처럼 우리 삶 가운데에도 세상에서 같은 세월을 보내다가 중도에서 마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은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시 90:3) 라고 말합니다. 인생은 돌아가야 됩니다. 어떤 사람들이 죽으면 ‘돌아가셨다’는 말을 종종 합니다. 그 사람이 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르고 세상을 마친 사람의 장례식에 가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요? 기독교인들이 즐겨 부르는 찬송가에 그 답이 있습니다.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찬송가 290장)
‘돌아갈 내 고향’이 있는 삶이 있는가 하면, 어디를 가는지 모르지만 가고 있다는 막연함이 연속될 뿐인 삶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세상에 무엇 하러 태어났는지 모르지만 태어났고, 바쁘게 지냈고, 왜 떠나야 되는지 모른 채 세상과 이별합니다. 우리네 가족들 중에 이미 보낸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록된 성경에 나온 아브라함은 옛날에 세상을 떠난 사람입니다. 그리고 나사로를 품에 안은 아브라함과, 불구덩이에서 눈을 뜬 부자의 대화는 이 세상이 아닌 육체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몸이 영혼을 간직하고 있는지 영혼이 몸을 데리고 있는지 따지지 않아도, 하여튼 영혼과 함께 육체가 남아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 영혼이 떠나는 날, 떠나는 그 시간부터 우리 몸의 세포는 서서히 분해되어 썩어갑니다. 세포가 서로 엉겨 있지를 못합니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시편 90:3)
이 말씀대로 사람이 죽으면 영혼만 떠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포가 자연 속에 흩어집니다. 자연이라고 하는 이 우주 공간 안에서 서서히, 서서히 모양을 바꿉니다. 우리가 지금 들이마시고 있는 공기 중에는 별의별 물질이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 조상들의 세포가 분해되어서 사라진 흔적들도 이 공간 중에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숨을 쉽니다. 이 조그만 콧구멍에 사람의 생명이 달려 있습니다. 답답하면 입을 벌리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사람은 참 약합니다. 아무리 힘센 장군, 세상에서 최고의 지위에 있는 사람도 콧구멍에 그 생명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 진다고 서러워 마라명춘 삼월 봄이 오면 너는 다시 피려니와가련하다 우리 인생 한번 가고 아니 온다
이 글은 제가 어릴 때 연극을 하면서 처음 읽게 된 것인데, 자라오면서도 이 내용이 제 생각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꽃은 3월이 되면 또 피어나지만, 우리 인생은 가버린다.’
성경속의 이 두 사람도 세상에서의 삶을 마쳤습니다. 여러분 가족 중에나, 친척 중에나, 동료 중에나 상을 당한 곳을 방문하면, 장례식이 있고 상여가 나가는 것을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그 죽은 자들 중에 이 두 사람도 끼었습니다.
재산이 위로가 되었던 사람, 하나님이 위로가 되었던 사람
예수께서 이 두 사람을 놓고 말씀하신 이유는, 이 사람들이 대표적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은 부귀영화, 재산이 위로가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돈 버는 방법을 가르치는 학문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돈 쓰는 것을 가르치는 학교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에서 이것저것 열심히 쟁취하기만 하다가 다 쓰지도 못하고 세상을 마칩니다. 빚을 진 채로 세상을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어떻든 마쳤을 때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같을 뿐임이니이다 (시편 90:4)
이 두 사람이 죽은 후 당한 일처럼, 우리네 인생도 어느 쪽이든 이 둘 중에 한 쪽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여기에서 조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부자가 눈을 뜨고 위를 올려다보니까 자기 집 문 앞에 있던 거지가 보였는데, 그 거지가 평소에 부자가 가장 존경하고 그의 민족이 가장 우러러보는 조상, 즉 우리나라로 말하면 단군 할아버지와 같은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의 품에 있었습니다. 자기 집 대문 앞에 누워있던 거지가 아브라함의 품에 있었으니 부자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이것이 만약 현실이라면, 아니 ‘만약’이라는 말을 붙일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이 현실이 아닌데 예수님이 거짓으로 하신 것이라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직접 하신 이 이야기는 진실이고 사실입니다.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알아 본 이 부자는 성경을 아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는 것도 아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 즉 ‘신앙이 없어도 괜찮고 법만 잘 지키면 돼.’ 하는 사람들, ‘잘 먹고 잘 살면 돼.’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이 아니라 이 부자는 아브라함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정신 무장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육체 밖에서 영혼이 눈을 떴을 때 아브라함을 알아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부자를 먼저 부른 것이 아닙니다.
저는 과거에 소설책을 읽다가, 그 소설에 나오는 인물을 글에서 묘사된 대로 그려 본 일이 있었습니다. 얼굴 모양은 어떻고, 이마는 어떻고, 눈썹은 어떻고, 콧날은 어떻고, 턱은 어떻고 그 글 내용대로 스케치를 해서 놓아두었습니다. 나중에 어디선가 그 소설에 대한 책을 찾아 읽어 보니까 제가 그렸던 그림과 아주 닮은 그림이 있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몽타주’라는 것이 나왔나 봅니다. 강도가 어느 동네에 가서 피해를 입혔다면 경찰들이 추적할 때 사람들의 말을 듣고 받아 적습니다. ‘이러, 이러, 이러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말들이 바로 몽타주로 그려집니다. 본인의 사진도 아니고, 초상화도 아닙니다. 강도를 본 사람들이 설명한 대로 그린 것입니다.
아마 이 부자도 아브라함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었기 때문에 실물을 처음 보고도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이름을 아는 이 부자는 글을 많이 배웠고, 지식도 많았던 사람입니다.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넓은 대문 안에서 온갖 것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거지는 결코 대문 안으로 들어간 적이 없었습니다. 그가 대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대문 앞에 앉아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태복음 7:13-14)
&nbs
로그인하시면 전체기사와 사진(동영상)을 볼수 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