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기한 | 일본 가깝고도 먼 이웃 나라 일본에서의 생활도 20년이 되어, 이제 일본은 나에게 제2의 고향이 되었다. 한국에서 있었던 어머니 모임 DVD가 도착하는 날은, 엔도르핀이 많이 나와 하루가 즐겁다. 해외 전도집회는 꼭 가보고 싶었으나,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지난 6월 전주에서 있었던 어머니 모임에서 필리핀 소식을 전한 정경화 형제님의 이야기를 인천의 한 자매를 통해 전화로 듣고, 아무런 준비 없이 마닐라로 향했다. 필리핀 카비테 집회 첫날, 말씀을 듣고자 오신 분들에게 필리핀 형제자매님들은 힘찬 찬송가로 환영해 주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모으는 이러한 집회 진행 방법이 참 좋았다. 집회는 아침 8시부터 시작하여 하루 동안 네 편의 말씀 테이프를 보았는데, 저녁 프로그램이 끝나면 밤 9시가 훌쩍 넘고는 했다. 그럼에도 졸지 않고 열심히 듣는 참석자들의 모습에서, 1970-80년대에 인천 청소년 회관, 시민 회관 등 여러 곳에서 보았던 우리 교제 속 복음의 열기를 필리핀에 와서 다시 보는 듯했다.나는 집회를 마치고 마닐라 모임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6천 명의 유대인을 구한 일본인, 외교관 스기하라 치우네의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 이야기를 글로 옮겨 달라는 권유로, 이 자리를 빌려 소개하려 한다.스기하라 치우네는 기후 현 출신으로, 의대에 가기를 희망하는 부모의 기대를 져버리고 1918년 와세다 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1919년에는 외무성 시험에 합격하여 러시아 국비 장학생으로 하얼빈으로 가게 되었고, 만주국 외교부에 부임했을 때는 북만주 철도 매각을 위한 소련과의 협상을 성사시키면서 일본 외무성에서 인정받게 된다. 이후 치우네는 소련 모스크바로 발령받았으나 철도 협상에서 불이익을 받은 소련은 그에게 비자를 내주지 않았고, 그는 핀란드 헬싱키로 부임하게 된다. 1939년 리투아니아 카우나스 일본 총영사관 영사대리로 발령받는데, 이 일은 치우네 인생의 전환점이 된다.1940년 7월, 리투아니아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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