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회 성경탐구모임 2004년 7월 31일 저녁
성경에 기록된 잔치들
누가복음 14장 7절부터 읽겠습니다.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상좌 택함을 보시고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가라사대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함께 먹는 사람 중에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누가복음 14:7-24)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알 듯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한 이상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말을 아직 배우지 못한 어린아이들과 대화해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작은 여자아이들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인형과 이야기하는 장면을 더러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인형이 대답을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요즘은 인형 속에 녹음 장치를 해서 대답을 하도록 만들기도 합니다만, 녹음된 말은 나와도 인형이 자기 의견을 제시하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진짜 사람인 아기는 말을 할 줄 모르는데도 어른이 계속 이야기를 하면 무언가 가만히 들으려고 하며 어른들의 말에 관심을 둡니다. 그런 자세가 없다면 아기는 평생 말을 배우지 못할 것입니다. 들리는 것이 없고, 안에서 공감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있는 이야기들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고자 하신 말씀을 어떤 특별한 사람을 거쳐서 해 놓은 것입니다. 그 말씀이 사람에게 전달되었을 때, ‘아, 이것이 하나님 말씀이구나.’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들 중에는, 산 중에서 혼자 길을 가는데 ‘아무개야!’ 하고 부르는 실제 소리 같은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원하는 신비주의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은 이 얇디얇은 인간의 귀청을 통해서 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주 음성 외에는 더 기쁨 없도다 (찬송가 500장)
하나님의 음성은 내 영혼 깊숙이에서 들려옵니다. 자기 소리가 아닌 어떤 힘이 자기 양심 속에서 작용합니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찬송가 469장)
주님의 사랑이 마음속에 비추어졌을 때 어떤 성도가 “주의 사랑 비췰 때에 기쁨 오네” (찬 414장) 라고 찬송했듯이, 우리가 자주 부르는 찬송가들도 자세히 보면 성경을 읽다가 어떤 영감을 받은 사람들의 글입니다. 저도 더러 시 비슷한 글들을 써보기도 했지만, 아직까지 하나님에 대한 시를 쓰는 것은 자신이 없습니다. 성경을 읽고 깨닫는 것은 있지만, 제가 하나님을 향해서 시를 쓸 만한 것은 아직 없습니다. 잡다한 인생의 경험들이나 기억을 더듬어서 몇 자 적은 것이 있을 뿐입니다.
구약 시대의 옛 선지자들은 위대한 소리를 기록하면서 ‘내가 어느 강가에 있을 때 여호와께서 내게 일러 가라사대’,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만군의 주께서 이르시기를’ 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필했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내용입니다.
신약 성경은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히 1:1-2) 하신 말씀대로 그들의 조상,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예수라는 아들을 보내서 그 아들을 통해 말씀하셨다고 설명합니다. 사도들은 그 아들에게 들은 이야기들을 옮길 때,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눅 1:1) 라고 말했습니다. 무엇이 이루어졌습니까? 사도들은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한 것이 아니라 구약 시대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일들이 그들이 살았던 시점에서 이루어졌다고 한 것입니다. 앞서 읽은 누가복음 14장의 말씀은 하나님 아들 예수라는 분이 사람들에게 초대도 받고 남의 잔치에 부름을 받기도 하시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저도 어릴 때부터 잔치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조그마했을 때는 더러 담 밖에서 남의 집 잔치하는 것을 넘어다보기도 했습니다. 어릴 때 남의 집에서 크게 벌이는 잔치에 온 동네가 떠들썩하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잔치라는 것은 참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세월이 지나면서 잔치의 양상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잔치 장면이 나오는 연극이나 영화도 많습니다. 그것들을 보면 우스운 사람들이 등장하거나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곤 합니다. 효과를 주기 위해서 그렇게 꾸몄는지는 몰라도 한쪽 구석에는 형편없이 차려입은 사람들이 짐승 취급을 받는 모습들도 보입니다. 저는 그런 광경을 볼 때마다 마음에 조금 이상한 것을 느낍니다.
성경에는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 15:17)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좋은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살지만, 영혼이 왁자지껄 시끄럽고 갈등이 있는 것은 배와 머리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어떤 잔칫집에 가서 분위기에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잔치에는 보통 대단한 사람들, 아니면 중요한 사람들이 초대됩니다. 영화나 연극이나 소설을 통해 많은 잔치들을 구경했지만, 성경에 기록된 잔치는 보통 사람들이 사는 동네의 잔치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잔치들의 내용은 의미심장합니다.
전도서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7:2)
지혜자의 마음은 잔칫집에 있지 않고 초상집에 있다고 했고 (전 7:4 참조) 사람들은 으레껏 초상집에 갑니다. 맞습니다. 초상집에 자주 가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본래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 제가, 세상에 살다가 간 어느 선교사의 일기가 기록된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미국에 건너가 인디언들에게 성경을 전하려고 하는데, 그들의 말을 모르니 뜻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영어를 하는 인디언 한 사람을 사서 통역을 하게 했습니다. 하필이면 이 사람이 술 주정뱅이였습니다. 성경 말씀을 통역하는 데도 술을 마시고 취해서 지껄이는 것입니다. 그러던 술 주정뱅이가 선교사의 설교를 통역하다가 완전히 변했습니다. 술 마시고 다른 사람한테 예수를 믿으라고 통역해 주던 그가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이 주정뱅이에게 전도한 선교사가 바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써 놓은 글 속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이 세상에 무슨 낙이 있겠는가? 세상에 와서 푸대접받은 그 분이 죽으신 이 세상에서 내가 무슨 낙을 누릴 게 있겠는가?’
제가 젊은 날 읽은 그 말이 제 심금을 울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아, 그 사람이야말로 진짜 잔칫집에 가지 않고 정확하게 초상집에 간 사람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들과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와 언젠가는 이별하게 됩니다. 젊은 사람이든 나이든 사람이든 상관없이 그렇게 됩니다. 사는 것은 잠시뿐, 언젠가는 이별할 세상에서 삶을 보내고, 시간이 가면 잊어버리는 그런 생을 삽니다. 덧없이 태어나 희로애락의 순간들을 보내고 덧없이 죽어가는 게 인생입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전 3:2) 라고 하신 말씀대로 내 영혼이 ‘나’라는 인생을 떠나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개개인에게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일입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 있을 때와, 가족들과 함께 있을 때, 그리고 내가 생활하는 곳에서 떠나 먼 객지에 가 있을 때 우리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타향에 가 있을 때의 마음은 내 집에, 또는 내 부모 형제들이 있는 집에 있을 때와 다릅니다. 내가 늘 지내던 장소에는 내 입김이 있고, 내 흔적이 보이지 않게 담겨 있지만 그곳을 훌쩍 떠나 낯선 곳에 가 있을 때는 감정이 다릅니다. 무언가 아쉬움을 느낄 것입니다. 그런 것들 때문에 우리 인생들은 자신이 이 세상을 살았던 흔적에 대해 추억하는 마음을 지워버릴 수가 없습니다.
딸을 시집보내거나 아들을 장가보내는 잔칫집에 아무나 오기를 바라겠습니까? 언젠가 신문을 보니까, 자녀를 결혼시키는 데 자녀의 큰아버지 되는 사람이 사회에서 꺼림을 받는 어떤 환자라는 것이 들통날까봐 조카 되는 사람과, 동생 집안 전부가 큰아버지를 생매장해 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세상 일입니다. 추태를 부린다든지 추한 것은 보여주지 않으려 하고, 깨끗하고 화려하고 좋은 것만 드러나기를 바라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그래서 잔칫날이면 옷도 잘 차려입고 분위기도 좋게 잘 차려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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