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용광 | 대구유교 사상에 젖었던 어린 시절유교 사상에 젖어 있던 저희 부모님은 아들을 얻을 때까지 자식을 낳으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는 위로 누나가 여섯이나 되고 밑으로 남동생과 막내 여동생을 둔 2남 7녀의 장남으로, 아들이 귀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1960년대 초에 어머니께서 어린 저를 안고 대구 2층 집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제가 태어났을 즈음 집안은 비교적 부유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후 부모님의 사업은 어려워졌고, 재산을 모두 잃고 판잣집으로 옮겨야 했고, 부모님은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고생하고 사셨습니다. 그럼에도 부모님은 재산과 아들을 바꾸었다고 생각하시며 아들로 위로 받고 사셨습니다.제가 기억할 수 있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는 집안의 경조사나 특히 제사에는 저를 빼놓지 않고 데리고 다니시며 집안 친척들에게 인사를 시키셨습니다. 또 어머니는 때만 되면 절에 가셔서 제 이름을 올려 두고 기도하셨고, 매년 초에는 점을 보고 와서 식구들의 한 해 운수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집안에 우환이 있을 때는 가끔씩 무당을 불러 굿판을 벌이기도 하셨습니다.초등학교 저학년 즈음에, 우리 집의 옆집이 헐리고 어느 교회가 지어졌습니다. 어린 때는 재미 삼아 주일학교에 다녔고, 철이 들어서는 바로 위의 누나를 따라 동네에 있는 한 교회에 다닌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의 이름 정도는 기억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도 시간은 왜 그리 소란한지, 집 옆에 있는 교회에서는 예배 시간만 되면, 특히 어두운 저녁에 기도할 때는 소름이 돋을 정도의 이상한 소리가 끊이지 않아 마음속에서 거부감이 일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옆에 교회가 있었지만 교회와는 거리를 두고 살아왔습니다.평안한 누나의 모습그러던 중에 천주교 재단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열심히 성당에 다니고, 나를 성당에까지 데려가기도 했던 다섯째 누나(용복)가 대학에 들어가고 어느 날인가부터 하나님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저희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넷째, 다섯째 누나는 다 교육대학교에 진학했습니다. 그런데 아주 성실하고 근면했던 넷째 누나가 성경 말씀을 듣고 온 어느 날부터인가 행동이 좀 다르게 변했고, 다섯째 누나도 그러면서 귀가 시간이 자꾸 늦어졌습니다.일요일에 어디에 갔다 오기만 하면,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마 24:32) 라는 말씀은 2천 년 전에 없어졌던 이스라엘이 1948년에 독립한 것을 의미한다는 것,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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