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회 성경탐구모임 2004년 7월 28일 오후
성경 전체에 흐르는 큰 줄기가 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상당히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40여 명의 유대인들을 통해서 모두 66권의 책을 쓰셨는데, 이것은 이 책을 기록한 사람들에게 어떤 한 가지 일에 대해서, 서로 다른 시기에 여러 가지 모양과 방법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받아 적은 사람들은 각기 나이도 다르고 살아온 시대와 환경도 달랐지만, 이 성경 66권 전체에 흐르고 있는 내용은 꼭 그들이 서로 의논해서 기록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하나하나 맞아 떨어집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성경이 누구에게 읽혀지고 들려지든지,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살아있는 말씀으로 들릴 수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보면 기적 중의 기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도 소설책을 꽤 많이 읽어보았습니다. 특히 제가 좋아하는 소설은 프랑스의 ‘삼총사’나 ‘몬테 크리스토 백작’과 같은 것인데, 이들은 동일한 시대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기록된 소설들이지만 어떤 한 가지 일관성 있는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어떤 부모들은 어린아이들한테 그 긴 소설들을 들려주면서 그 시대적 배경이나 정치적 배경들은 모두 빼고 줄거리만 말해 줍니다. 나중에 이 아이들이 성장해서 그 시대적 배경이나 역사적인 배경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책을 읽으면, ‘아, 이 이야기의 배경에는 나폴레옹 왕조와 원래 프랑스 정권과의 갈등이 깔려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세상에는 많은 소설책과 역사책들이 있지만, 이 세상 인류 전체를 향해서 동일한 흐름이나 주제로 부르짖는 부르짖음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참 특이한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의 끝 부분에, 사도 바울이 디모데라고 하는 상당히 젊은 전도자에게 쓴 편지 속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디모데후서 3:15-16)
디모데의 아버지는 헬라인이었지만 어머니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디모데는 어릴 적부터 유대식 교육을 받아온 것 같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자녀를 기르시면서 착각 아닌 착각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어릴 때부터 아이들한테 복음을 너무 많이 가르쳐 놓으면 나중에 커서 구원받기가 어렵다라든가, 어렸을 때 많이 들었기 때문에 복음을 무시한다고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복음을 많이 듣고 자란 아이들은 커서 구원받지 못하고 헤맬 것이라는 걱정 아닌 걱정을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 역시 성경을 통해서 어떤 말씀을 깨닫기 전에는, ‘내가 전부 다 아는 내용인데, 어릴 때부터 다 들었던 내용인데.’ 하는 착각 속에 빠져서 마음이 상당히 교만해져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많은 성경 이야기를 접해 왔지만, 거듭난 이후에야 비로소 성경 전체에 흘러가는 엄청난 줄거리가 있다는 것이 제 눈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성경을 너무 성급하게 보는구나. 성경 전체에 나타나 있는 해답만 보고 문제를 모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너무 빨리 판단하고, 조금 지나칠 정도로 성경을 마음대로 해석하는 무리들이 생겨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등식
제가 산수 문제를 하나 내겠습니다. 계산해 보십시오. 1 2 3 4 5 6 7 8 9 10 11은? 답은 몇입니까? 66입니다. 여기에서 “1 2 3 ... 11” 이라는 긴 문장 안에는 숫자가 열한 개가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숫자 사이에 더하기라는 표시 ‘ ’가 열 개가 들어갑니다. 그리고 ‘=’ 표시가 있고, 답은 ‘66’ 이라는 한 가지 숫자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면 이 공식에서 앞부분과 ‘66’이라는 한 숫자가 여러분은 같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다르다고 생각하십니까? 분명히 같습니다. 모양이 다르고 펼쳐진 방법이 다를 뿐이지 반드시 같은 답이 나온다는 것을 초등학교 때 산수 공부하신 분들은 다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성경을 어떻게 접합니까? 우리가 살다 보니까 어쩌다 죄를 짓고, 율법이 무엇인지, 예수님이 이 세상에 무엇 때문에 태어나셨는지, 또 무엇 때문에 죽으셨는지, 무엇 때문에 살아나신 것인지, 무엇 때문에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지 아무것도 모르고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누구에게서 ‘어디 집회에 한 번 가 보자. 어디 가니까 강사님이 좋은 말씀 하신다더라.’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를 따라가서 성경 말씀을 듣다 보니까 로마서 1장 뒷부분,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롬 1:21-23) 는 말씀으로부터 시작해서 정말 가슴을 찌르는 말씀들을 통해 자기 마음속에 일어나는 엄청난 죄성들을 들여다보고 고민하다가, ‘그 이유 때문에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라는 말씀을 보고 즐거워하고 좋아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것을 발견하기 전이나 이후에라도 우리가 성경을 자세히 읽다 보면, 분명히 부지런히 살피고 연구하면 어떤 것이 보이고 어떤 일관적인 내용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도 그런 내용을 알게 모르게 무시하고 삽니다.
성경은 모두 몇 권입니까? 알기 쉽게 3×9=27 즉 구약 39권 신약 27권 모두 합해서 66권인데, 특히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기록된 구약 39권의 책들은 1부터 11까지 더하는 앞부분의 산수 공식과 상당히 닮은 부분이 있습니다. 반면 신약 27권의 책들은 뒷부분의 산수 공식처럼 간단하게 모든 것에 대한 답을 내려놓았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러이러한 말씀을 하셨다. 이런 말씀을 하시고 유대인들에게 어떤 이유 때문에 잡히셨고, 유대인과 로마 정부가 결탁해서 예수를 처형했다. 그렇지만 예수가 처형된 것은 이 세상 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였다.’ 라는 것을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을 읽어보면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를 보면, 요셉의 이야기 배후에는 성경 전체를 좌우지하는 엄청난 계획이 들어있습니다. 요셉이 자기가 알지 못하는 어떤 엄청난 힘에 사로잡혀서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리 끌려 다니고 저리 끌려 다니며 온갖 고생을 다한 끝에 이집트의 총리대신이 되어 지내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내용 안에서도 우리는 이것이 ‘언젠가는 이스라엘 땅 감람산에 다시 오셔서 구세주로 군림하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다.’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고, 역사를 주관해 가시는 하나님의 엄청난 능력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이와 같이 창세기 1장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신 말씀부터 말라기 끝장까지 계속해서 흘러가는 복잡하고 어렵고 또 지루하기도 한, 그야말로 사막 같은 구약의 이야기들을 우리가 부지런히 살피고 연구했을 때 나타나는 어떤 한 분의 모습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도 잘 아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7장에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의 하속들이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46절) 라고 했던 바로 ‘그 사람’ 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되돌려드려라
매년 성경탐구모임에 참석하는 사람에게 누군가 묻습니다.
‘무엇 때문에 거기 가느냐?’
‘교제하러 간다.’
‘교제는 어떻게 하느냐?’
‘교제? 형제자매들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거지. 대화를 하면서 내 마음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하고, 또 복음이 어떻게 전해지고 있는지 듣다 보면 마음에 기쁨이 찾아오지. 이 교제를 위해서 간다.’
이 교제가 행해질 수 있도록 매개체로 쓰이는 것은 우리들이 입으로 하는 ‘말’입니다. 또 성경 말씀을 귀로 듣거나 눈으로 읽을 때도 매개체로 쓰여지는 것이 바로 ‘말’의 다른 형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로 먹고 말로 사는 사람들인데, 말의 힘이 얼마나 센가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설교를 하면서 계속 한 사람만 바라보고 이야기하면,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일만 명의 청중이 앉아 있는데 9,999명은 온데간데없고 그 한 사람한테만 계속 이야기하면 아마도 그 사람은 쥐구멍으로 기어들어가고 싶을 것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이야기한다는 강사가 갑자기 성경 이야기는 안하고 ‘너 저번에 무슨 죄 지었잖아?’, ‘너 그때 누구 물건 훔쳐 썼잖아?’, ‘너 누구 돈 떼어먹었잖아?’ 하고 계속해서 한 사람을 다그친다고 가정해 봅시다. 강사가 내려가서 그 사람을 때린 적도 없고, 메어친 적도 없고, 목을 조른 적도 없지만 그 사람은 공격을 당하고 있습니다. 멀리 떨어져서 ‘너 잘못했잖아. 잘못했잖아.’ 말로만 공격하는데도 그 말을 들은 사람은 나머지 9,999명이 자기를 쳐다볼까봐 얼굴은 화끈 화끈 달아오를 것입니다. 빨리 주차장으로 달아나서 차를 타고 집으로 도망가야 되겠는데 내려가는 길은 또 왜 그렇게 먼지, 내려가다 보면 책방도 있고 매점도 있는데 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부끄럽고, 차를 타고도 너무 열이 나니까 에어컨을 시원하게 틀어놓고 집에 갈 것입니다. 집에 가서도 얼마나 분하고 원통한지, ‘그 강사, 언제 한번 혼내줘야겠다’ 하고 뼈가 마를 정도로 분해합니다. 그 분함이 몇 달은 갈 것입니다.
그런데 강사가 그 사람에게 어떤 방법으로 해코지를 했습니까? 때렸습니까? 때리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물리적인 힘을 가하지 않았는데도 그 사람은 몸이 아파서 누워 있는 사람보다 더 나쁜 상태로 집에 가서 드러누울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우리가 내뱉는 하찮은 한 마디 말도 상당한 위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마태복음 12:36-37)
예수님은 우리가 내뱉는 말에 대한 책임에 대해 설명하고 계십니다. 이런 말씀을 읽으면 속이 뜨끔해서 ‘아, 심판 날에 하나님한테 점수 잘 따려면 오늘부터 내 입으로 욕은 하지 말아야 되겠다.’ 해서 평소에 ‘이놈의 새끼, 저놈의 새끼’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도 ‘아휴, 오늘부터는 이 친구 저 친구라고 말을 바꾸어야 되겠다.’ 하고 상당히 종교적인 방법으로 자기 습관을 바꾸어 가려고들 노력합니다.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한 이 내용 속에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평소에 입으로는 말하지 않고 이런 곳에 왔을 때 찬송으로 할 정도라 하더라도 내 마음속에 하나님과의 대화가 분명히 있는데, 그 하나님과의 대화 중에 내가 하나님께 어떤 말씀을 올리느냐 하는 것을 한번 생각하고 넘어가야 됩니다. 이사야서 8장 20절부터 22절까지 봅시다.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주릴 것이라 그 주릴 때에 번조하여 자기의 왕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쳐다보거나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중으로 쫓겨 들어가리라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즉 우리가 입으로 하는 이 말, 마음속 아주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나의 부르짖음이 이 말씀과 맞지 않을 때는 복이라고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이런 찬송이 있습니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찬송가 204장)
영어로는 “This is my story this is my song” 맞습니까?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이다” 하는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는 그 부르짖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하는 이 말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이어야 합니까. ‘내가 이런 말을 하나님한테 하면 하나님이 좋아하실 것 같다’라고 생각해서 ‘하나님, 저는 어릴 때부터 교회도 열심히 다녔고 어쩌고...’ 중언부언합니다만, 과연 하나님이 좋아하시겠습니까? 우리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하나님과 대화를 할 때, 또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갈 때 우리가 하나님께 돌릴 수 있는 것은 자기 스스로의 생각에서 우러나오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께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님이 내게 해주신 그 말씀을 되돌려드리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리이다 (호세아 14:2)
무엇으로 무엇을 대신한다고 되어 있습니까? “입술로 수송아지를” 창세기에 나타나는 이 짐승의 제사 이야기입니다. 아담이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 명하신 선악과를 먹는 죄를 범한 후에 눈이 밝아져서 자기가 벌거벗은 것을 깨닫고 자기 손으로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부끄러운 곳을 가린 후 옷을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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