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아 1700년 5월 26일, 니콜라우스 루드비히 본 친첸도르프 운트 포텐도르프 백작은 유럽의 고명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18세기 초, 열렬한 추앙과 논란을 불러일으킨 인물이었고, 마틴 루터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독일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존경을 받았다가 멸시받고, 사랑을 받았다가 박해를 받고, 흠모를 받았다가 조롱을 받은 친첸도르프. 어떻게 그 한 사람에 대해 이토록 강렬한 반응들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살았던 시대와 배경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친첸도르프가 태어난 시대에는 현재의 독일이 약 300개의 작은 독립 자치주로 나뉘어져 각각의 봉건 영주와 공작과 왕자들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당시 궁정은 스페인 궁정의 엄격하고 보수적인 예식이 프랑스 궁정의 자아도취적이고 화려하며 퇴폐적이고 타성에 젖은 예식으로 바뀌고 있을 때였다. 주권자는 백성들에 대해 절대적인 통제권과 소유권을 갖고 있었고, 귀족과 평민 간의 괴리는 극에 달해 있었다.당시 색소니(지금의 독일 작센) 지방에서 가장 우세한 종교는 루터교였다. 마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쓴 지 거의 2백 년이 지난 시점에 루터교는 가톨릭만큼이나 형식화, 의식화되어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개혁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개인의 신앙을 교리보다 중시하고 성서를 개인과 일반인들에게 널리 공개하며 교회의 운영에 평신도들을 포함시키고, 살아 있는 신앙의 열매를 맺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할 것을 강조하는 운동이었다. 이것이 바로 다시 한 번 교회를 개혁하자 외치는 경건주의 운동이었다. 경건주의 운동의 창시자인 필립 야콥 스페너는 친첸도르프의 외조부모와 가까운 사이였는데, 그가 친첸도르프의 외조부모 가문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친첸도르프의 아버지 가문은 원래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16세기 중반, 처음으로 신교로 개종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친첸도르프의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에라스무스는 가톨릭교로 강제 개종 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에서 자신의 모든 재산을 팔고 독일의 프란코니아 지방으로 이주했다. 그의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뜨고 어머니는 재혼하였기 때문에, 친첸도르프는 대부분 외조모인 헨리에테 카타리나 폰 거스도르프에 의해 양육되었다. 그녀는 특출난 여성이었다. 여러 개의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예술과 음악적인 재능이 있었으며, 자산가였고 또한 경건주의 운동의 지지자였다. 그녀의 신앙은 친첸도르프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할머니의 방에서 잠을 자며 그녀가 매일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할머니가 없었으면 자신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다.친첸도르프는 말년에 제네바에서 한 어느 강연에서 자신이 어린 시절에 어떻게 하나님을 믿게 되었는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내가 아주 어릴 적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저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것은 저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는데, 속으로 ‘주님이 생전에 어느 누구에게도 존경받지 못하셨다지만 나였다면 그분께 가서 살아도 함께 살고 죽어도 함께 죽었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오랜 세월동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고난이 얼마나 위대하고 충만한 것인지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 자신의 비참함과 무능함도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 역시 구원받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습니다. 어느 특별한 날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어느 날 저는 창조주께서 저를 위해 받으신 고난에 크게 감동받고 눈물을 쏟았는데 그 후로 훨씬 더 가깝게 그분께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오십 년 넘게 사람에게 하듯 구세주와 대화를 나누었고 매일 그분과 대화를 나누며 행복했습니다.”* (* 아우구스트 고트립 슈프랑엔베르크(August Gottlieb Spangenberg): 니콜라스 루이스 친첸도르프 백작의 생애(The Life of Nicholas Lewis Count Zinz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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