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혁기 / Hyuk Kee Yoo
제42회 국내외 성경탐구모임 3
이 강연은 2010년 제42회 국내외 성경탐구모임 중 7월 25일 저녁 강연을 정리한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1)
태초에창세기 1장 1절부터 보겠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창세기 1:1-2)
앞서 우리는 성경에 “태초에”라는 말이 나오는 여러 성구들을 살펴 보았습니다. 요한일서 1장 1절에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요한복음 1장 1장에서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번에는 성경의 제일 첫 장의 창세기 1장 1절을 보겠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언급되었던 요한이 쓴 글에는 ‘태초에’라는 표현 뒤에 사상적인 내용이나 어떤 상태를 나타낸 내용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창세기 1장에서는 ‘태초에’라는 표현 뒤에 무언가 행동하는 내용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무엇을 하였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물 한 컵을 마시는 것에 대해 표현할 때 ‘물이 저 사람의 뱃속에 있다.’라고 표현하는 것과 ‘저 사람이 물을 마셨다.’라고 표현하는 것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구절을 대할 때 사람들은 어떤 거룩한 모습을 상상합니다. 인간 본성에 있는 종교적인 상상력으로 이 구절을 대하면서 마치 영화에서 음악이 흐르면 뿌연 안개와 함께 나타날 법한 신령한 무언가를 떠올립니다. 우리 인간은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하나님과,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인간적인 종교성으로 미화시키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이나 요한일서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과 같은 구절을 보면, 무언가 상상을 하게 됩니다. 그처럼 이 말씀들은 우리가 이해하기 힘들게 기록되어 있습니다.그런데 창세기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하나님께서 일을 하고 있는 듯한, 행동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볼 때 섣불리 판단해 버리기도 합니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하니 ‘맞아. ‘펑’ 하고 대폭발을 하여 이 우주가 생겼겠지.’라고, 과학 시간에 배운 내용을 머릿속에 그립니다.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 천지를 창조한 주체가 정확하게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천지의 창조를 계획하고 이 세상의 모든 것, 땅과 하늘에 있는 것, 존재하는 모든 것을 계획하고 디자인한 분은 분명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 하나님의 생각을 그대로 행동으로 옮겨 이루어 나가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분을 우리는 아들 하나님, 또는 성자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성경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구절을 보면, ‘그렇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지.’하고 단순하게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구약 성경에 나타난 이 하나님은 누구입니까?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아들 하나님구약 성경 이사야서에는 “그 날에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자를 쳐다보겠으며” (17:7)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사람이 자신을 지은 창조자를 직접 눈으로 볼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기독교인들이 알기로는 이 세상에 재림하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이사야서 말씀에서 그 날에 창조자를 본다고 했으니 ‘그때 아버지 하나님도 함께 재림하시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삼위일체는 쉬운 개념이 아닙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라는 용어의 개념을 따지기 전에, 먼저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고 분명히 말씀하신 예수님에 대해 한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마 7:13-14) 고 ‘좁은 문’에 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또 “나는 양의 문이라” (요 10:7) 고 하여, 예수님 자신이 양 무리가 드나드는 그 양의 문이라는 말씀도 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숙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신 것을, ‘세상 사람들이 크리스마스에 파티를 즐길 때 나는 교회에 간다.’, 혹은 ‘많은 사람들은 일요일에 예배당에도 안 가고 집에서 TV나 보지만 나는 교회에 간다.’는 식의 행동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그 말씀을 인간의 행동 기준에 맞추어 얄팍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은 절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에 맞추어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성경 안에 있는 좁은 문을 발견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는 방법도 예수께서 하신 말씀에 맞추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분께서는 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고도 하셨고, “나는 양의 문이라”고도 하셨습니다. 우리가 성경 안에서 무언가 확실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성경을 바라보는 방법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성경 말씀 속의 많은 내용들을 정확하게 보기 위해서는 일종의 현미경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라는 분을 통해 성경 말씀을 바라보았을 때 우리는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나셨고, 무엇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 앞에서 저런 말씀을 하셨는지, 또 구약 성경에 나타나 있는 많은 내용들이 무엇 때문에 있었는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라는 한 사람을 통해 비추어졌을 때 우리에게 그 의미가 살아서 다가오는 것입니다.“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 5:39) 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고 ‘그렇다면 그 다음에는 또 무슨 말씀을 하셨나?’ 하고 생각하며 따라 읽어가다 보면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요 5:46) 는 말씀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쓴 글은 무엇일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기록한 글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이 모세가 쓴 글에 자신의 모습이 나타난다고 하셨습니다. 또 누가복음에도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4:27) 는 내용이 있고, 사도행전에도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28:23) 는 말씀도 나옵니다. 이처럼 구약 성경은 모세의 글과 선지자의 글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글들은 바로 예수에 대해 기록된 글인 것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모세가 쓴 창세기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구절 속의 하나님은 과연 누구일까요? 우리는 그것을 궁금해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잠언 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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