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회 국내외 성경탐구모임 2000년 7월 23일 저녁 -시편 49편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된 성경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누가 ‘성경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냐?’ 라고 물으면, 입으로 쉽게 그렇다는 대답을 합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으며 살고 있으니 아는 성경 구절에 대해 이야기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양심 깊숙이 ‘그렇다, 성경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는 확신을 가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성경을 자주 읽고 많은 성경 구절을 외우고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그 말씀은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가까이할 때마다 ‘하나님,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십시오’ 하는 간곡한 부탁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자신이 외우고 있는 구절이라고 해서 그 뜻을 정확하게 아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이런 말들을 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가라사대”
사람들은 말씀을 기록하면서도 자기 스스로 한 말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말입니다. 그 말씀들이 바로 구약 성경이 되었습니다. 훗날 한 사도가 성령을 받은 후에 한 말이 있습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베드로전서 1:10-11)
옛날 선지자들은 인간의 구원에 대해서 설명하는 데 있어서 자기 속에 -그 두뇌 속에, 정신 속에, 요즘 용어로 말하면 기억 세포 속에- 무언가 자신이 생각하지 않았던 말이 떠올라서 그것을 옮겨 기록했습니다. 그 기록한 말이 성경입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40명 가까이 됩니다만, 그들이 하는 일은 다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왕으로서 기록했고, 어떤 사람은 농부로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약 천오백 년이라는 기간에 걸쳐 여러 장소에서 기록했습니다. 그렇게 기록한 내용들을 두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들 중에서 자기 이름을 후세에 남기려고 성경을 기록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 중 유대 민족이 모으고 정리한 옛글들이 합쳐져 구약 성경이 되었습니다. ‘구약’ 즉 옛 언약, 옛 약속이라는 말입니다. 작은 책자이지만 서른아홉 권이 모여 있습니다. 참 이상하게 만들어진 책입니다. 신약 성경 히브리서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히브리서 1:1-2)
이것은 구약 성경을 기록했던 선지자들의 후손이 한 말입니다. ‘선지자(先知者)’는 선각자(先覺者), 즉 하나님께서 일을 맡긴 사람들입니다. ‘우리 조상들’이라 함은 유대인의 조상, 히브리인의 조상들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라고도 하는 그 유대 민족의 후손 중 한 사람이 자기 조상들에게서부터 물려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일컬어, 그것은 어떤 사람이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자기 조상들에게 말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말씀하여 오신 하나님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구술을 대필한 경우 그 글을 두고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유언장이나 중요한 글들도 본인이 쓰지 않고 다른 사람이 쓰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직접 글을 쓰지는 않으셨습니다. 직접 쓰신 일이 있다면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두 개의 돌판에 십계명을 새겨 주시던 때입니다.
그때로부터 약 6백 년 전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이라고 일컫고, 이스라엘 민족 또는 히브리 족속이라고도 일컫는 사람들의 원 조상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은 잘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미국 링컨 대통령의 이름이 에이브러햄이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 에이브러햄이 아브라함과 같은 이름입니다. 후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이름을 따서 자기 아이들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한 나라를 창설한 시조였지만, 위대한 건국 신화 하나 남기지 않았습니다. 세상에는 나라를 창설하고 이끈 사람들을 신격화하는 건국 신화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신화들을 살펴보면 그들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든지, 알을 깨고 나타났다든지 하는 비현실적인 내용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유독 유대인의 조상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현 이스라엘 땅에 있는 요단강을 넘어 유프라테스 강, 티그리스 강이 있는 쪽으로 가면 갈대아 우르라는 땅이 있는데 -현재 이라크 지역입니다.- 그쪽에서 서서히 옮겨왔다는 것입니다. 그의 조상 아브라함은 나그네였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정직한 역사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 12:1) 고 명령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정든 고향이자 자기 선조 대대로 살아온 그 아름답고 비옥한 땅을 버리고 앞날이 어떠할지 알 수 없는 길을 떠났습니다. 그 길이 고난의 길인지, 행복의 길인지, 어떤 역경들이 닥칠지 전혀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출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으로 가는 도중, 하란에 잠시 머물 때 그의 아버지 데라가 죽었습니다. 그 후 그는 다시 길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이민족들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이곳은 현재 이스라엘 땅, 유대인과 팔레스타인들 사이에 분쟁이 벌어지고 있는 그 지역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께로부터 약속을 받았습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창세기 13:14-15)
그러나 당시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늙어갈수록 두 부부의 자식에 대한 희망도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땅을 물려 줄 자손이 없으니 데리고 사는 종으로 상속자를 삼아야겠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아브라함에게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창 15:4) 는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아이를 낳지 못하자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지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창 16:2) 하고는 이집트에서 데려온 자신의 여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첩으로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86세 때 하갈에게서 아들을 낳고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지었습니다.
지금도 아랍 여러 나라 사람들의 이름 중에는 이스마엘이라든가, 이스마엘리아 같은 이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스마엘을 낳은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이 약속된 후손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창세기 17:15-16)
이 말을 들은 아브라함은 속으로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라고 생각하면서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하나님께 말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 17:17-19 참조) 그 약속의 말씀대로 일 년 만에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아기는 태어나기도 전에 이름이 미리 지어졌습니다. 그 이름은 이삭입니다. 이삭이 태어난 후 이스마엘은 집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스마엘은 후에 아랍 여러 족속들 중 하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삭은 장성한 후 쌍둥이 아들을 낳았는데, 그들이 에서와 야곱이었습니다. 이 둘 중에 형 에서는 이삭의 대를 잇지 못했고 동생 야곱이 대를 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을 씁니다. 서양 사람들의 이름 중에 제이콥이나 제임스라는 이름은 야곱과 같은 이름입니다. 야곱을 통해서 난 열두 아들들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의 열두 지파가 형성되었습니다.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로 있던 시절, 야곱의 아들들과 그 가족들은 이집트에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집트에 가서 사는 동안 많은 세월이 흘러 이스라엘 백성의 수는 날로 늘어갔습니다. 그들은 초기에는 비옥한 땅에서 대우를 받으면서 살았지만, “네 자손은 사 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창 15:16) 라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대로 사 대가 지났을 때에는 포악한 이집트 왕의 지배 아래 노예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불쌍하게 보셨습니다. 그들을 이집트로부터 이끌어 내려 하실 때에 적당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그 즈음에 이집트 왕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너무 많이 번성하자 산파들을 시켜서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무조건 죽여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이스라엘 여인들은 아이를 몰래 낳았던가 봅니다. 그 중 레위 지파의 한 여자가 사내아이를 낳아 석 달 동안 숨겨 기르다가, 아이가 자라자 더 이상 키울 수 없어서 광주리에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그 속에 아이를 넣어 나일 강 갈대 사이로 떠내려 보냈습니다. 그때 이집트 왕궁의 공주가 시녀들을 데리고 목욕하러 나왔다가 그 아기를 발견했습니다. 이 대담한 공주는 이 아이를 양자로 삼고, ‘물에서 건져내었다’는 뜻으로 ‘모세’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저는 이 성경을 읽으며 ‘역시 왕녀는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백성들을 내려다보는 왕녀의 위치에 있었으므로, 그 많은 백성들 사이에 히브리 아이가 하나 끼어드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느냐 생각했을 것입니다.
한편 그 아기의 누나는 떠내려 보낸 아기가 걱정이 되어서 갈대밭 사이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 이집트의 공주가 귀여운 아기를 건져내어 보고 있자, 아기의 누나는 공주에게 가서 “내가 가서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당신을 위하여 이 아이를 젖 먹이게 하리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상황에 들어맞는 말을 한 것입니다. 요즘 같으면 ‘너는 이 아이가 누구 집 아이인 줄 아느냐?’, ‘너는 도대체 누구냐?’ ‘누구를 유모로 소개하려고 그러느냐?’ 하고 까다롭게 캐물었겠지만, 공주는 소녀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그 아기는 친 어머니의 품에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아기는 어머니의 젖만 먹고 자란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정신, 어머니의 신앙 그 모든 것을 배우면서 자랐습니다. 육신은 공주의 양자로서 이집트의 왕궁에서 컸지만, 그의 정신은 이스라엘 소년으로 자란 것입니다. 이 아이는 훗날 장성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로부터 끌어내는 중요한 일을 맡았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가장 위대하게 생각하는 모세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 광야로 들어간 후, 시내 산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는 직접 돌판에 십계명을 새겨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쓰셨는지는 모르지만, 모세는 하나님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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