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리는 ‘로마서를 읽으면서’ 2000년 8월 26일 강연을 정리한 것입니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로마서 11:17)
이방인의 사도, 바울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 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로마서 11:13-24)
앞서 읽은 말씀 중에 ‘감람나무’라는 말이 나오는데, 원래는 올리브 나무입니다. 성경에 감람산이라는 말도 있는데, 올리브 산입니다. 우리말 성경이 번역될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아마 올리브 나무에 대한 상식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올리브 나무는 한 포기도 없었습니다. 중국에 는 감람나무가 있습니다. 감람나무는 올리브 나무가 아닙니다. 성경에는 나무를 비유로 이야기하신 내용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중에서 예수께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5절) 라고 하신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포도나무의 비유가 가장 강력합니다.그런데 앞서 읽은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전혀 생각해 보지도 못했던 올리브 나무를 비유로 들어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이 성경 내용에서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이전까지 우리는 로마서 11장 1절부터 12절 내용을 공부했습니다.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는 말씀에 대해 살펴보았고 다윗이 시편에 자기 동족인 유대인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에 대해 저주스러운 말을 한 내용도 살펴보았습니다.
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로마서 11:9-11)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사람들이 저주의 말씀대로 되길 바란 것이 당시 선지자의 심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거역할 때 그들은 그런 지경에 처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저주받은 사람들에게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바울의 마음에 있었습니다.우리가 복음을 안 후에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이야기하면 잘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잘 받아들이는 사람에 대해서는 고마운 마음이 드는 반면, 엉뚱한 궤변을 늘어놓으며 꼬치꼬치 따지는 사람들을 대할 때면 ‘눈이 멀어도 한참 멀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잘 받아들이는 사람 중에는 또 아무런 의문을 가지지 않고 쑥쑥 받아들이다가 나중에 ‘좋은 말씀 들었습니다.’라고 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모습들을 볼 때면 복음을 전하려는 힘이 다 빠져 버리는 것 같습니다. 자기의 마음속에 한 번 해결되기만 하면 충분한데, 그러지 못하고 성경이 말하는 복음을 세상의 도덕으로 받아들이면 그 복음은 아무런 가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그래서 이 사도 바울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의 계획 속에서 자기 동족이 제외된 것이 너무 안타깝고 불쌍하여 그들이 구원받았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로마서 9장, 10장, 11장을 기록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으로 태어난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 자기 동족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서 제외된 것과 또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인 것에 대해, 육신적으로 생각하면 참 서운했을 것입니다. 자기 동족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니 말입니다. 바울은 자기 동족에게 한없는 동정심과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롬 10:1) 는 말도 했고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롬 9:3) 며 자기 동족의 구원을 바란다고 했습니다. 한편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을 미워했고 죽이려고도 했습니다. 돌로 쳤는데 그가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내친 적도 있습니다. (행 14:19 참조) 그래도 바울은 살아나서 전도하러 다녔습니다. 그렇게 유대인들에게 핍박당했지만, 바울은 자기 동족의 구원을 간절히 원했습니다. 자신은 분명히 유대인인데, 유대인들이 버림받은 것을 알면서 왜 이방인의 사도로 활동해야 되느냐는 것입니다.그러면서도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을, 자신의 직분을 상당히 영광스럽게 여긴다는 말을 했습니다. 자신이 유대 민족이며 베냐민 지파라고 강조하면서도 로마서 11장 13절에 와서 이방인의 사도 된 자기 위치를 한 번 더 강조합니다.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13절)
로마서 11장 1절 서두에도 있는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의 “내가”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바울밖에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 말을 할 자격이 없지만 바울에게는 그만한 자격이 있습니다. 이 ‘내가’에는 그 누구도 끼어 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그 자리에 다른 사람, 바로 베드로를 끼워 넣었습니다. 베드로는 거기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쓴 사람은 사도 바울이며 로마에 가서 생애를 마치다시피 한 사람도 바울입니다. 로마 교회가 누구에 의해 처음으로 시작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각 나라에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왔다가 오순절 날 성령의 역사가 있었을 때 성령을 받고 복음을 전하러 로마에 간 듯합니다. 바울은 자기 위치를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을 보면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자신의 위치에 대해 정확하게 말한 내용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는, 성경을 잘 안다는 자부심을 가진 자들이 확실하고 깨끗한 복음이 전해진 그 지역에 와서 그곳 사람들에게 믿기만 해서는 안 되고 무언가를 좀 더 해야 한다고 부추긴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사랑을 안 사람은 그 사랑을 알았다는 희열 때문에 무언가 하고 싶은 열심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갈라디아에 가서 열심을 부추겼던 사람들은 유대인도 지키지 못했던 율법을 억지로 지키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 1:8) 라고 아주 강력하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잘못된 것을 전하는 사람들 중에는 거짓 형제들, 그리고 잘못 믿는 사람들도 있다는 말을 합니다.갈라디아서 2장 4절부터 보겠습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가만히 들어왔다’는 말은 교회당에 문을 살짝 열고 들어왔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도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교제 속에, 주님을 통하여 구원받은 경험도 없이 얼버무려서 들어와 있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자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의 평화를 엿보고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자기 수하에 넣으려고 온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갈라디아서 2:5-6)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처음 사도들은 속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들이라 해도 바울 자신에게 상관이 없고 그들이 바울에게 더해준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갈라디아서 2:7-8)
“내가”, 사도 바울이, “무할례자”, 유대인 아닌 이방인에게 복음 전함을 맡았습니다. 베드로가 할례 받은 유대인들에게 복음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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