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도행전 20:25-38, 1999. 11. 6. 강연
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사도행전 20:25-38)
넓고 높고 크신 하나님의 뜻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면 자신에게 위험이 닥칠 것을 예상하고 있었고 죽음까지도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전에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 모아 놓고 마지막 고별인사를 하면서, 자기가 살아온 흔적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떠난 후에 성도들을 어떻게 가르치라고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조금도 거리낌 없이 다 너희에게 전했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바울의 모습은 참으로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바울이 보낸 서신들에는 그가 살았던 삶의 모습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었고, 그 편지를 받은 사람들은 바울의 삶이 그의 가르침과 같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자신 있게 이야기를 했습니다.이런 말씀들을 통해 우리는 ‘이런 일이 있었기에 이 살아 계시는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까지 그대로 전해질 수 있었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성경은 설교 모음집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성도들의 삶의 모습을 볼 수 있고, 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에 대한 하나의 표본으로서 그들이 살아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내용을 읽을 때마다 바울의 이 설교보다 더 위대한 설교는 없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설교집들은 많지만 이토록 위대한 설교는 없습니다. 말하는 사람의 말과 행동이 같았기 때문입니다.사도 바울이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4 고 한 말은, 단순히 인간적인 각오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삶이 그를 떠밀어가는 것입니다. 달리던 기관차가 탄력이 붙으면 기관차가 더 빠르게 달리는 것처럼, 바울은 자신이 살아왔던 흔적에 떠밀려 푯대를 향해서 그대로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지금은 너희가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사도행전 20:25-26)
“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는 말은 에베소 장로들과 같이 살고 교제를 하면서 그들에게 바울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보여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죽음을 앞둔 사람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하지 않던 농담이나 하다가 죽는 사람도 있고, 강인한 정신력으로 위대한 말을 남기고 죽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삶을 그대로 마치거나 집이나 자녀에 대한 염려를 남길 뿐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죽음 앞에서 자신이 살아온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때까지 자신이 어떻게 달려왔는지 거리낌 없이 말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자랑이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할 때도 그만한 자신감을 가지고 부탁했습니다. 이런 사도 바울의 모습은 약한 우리들에게 모본이 됩니다.바울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깨끗하다고 하며 마지막 떠나는 사람으로서 자기의 할 일은 다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복음을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복음 전하는 일에만 책임을 다한 것이 아니라, 믿는 형제들의 집집을 다니면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대화하며 영혼의 목자답게, 목자장이 다시 오실 때에 칭찬받을 수 있는 사람답게 모든 행동을 깨끗하게 했다는 말입니다. 즉 성도들이 자신을 모본으로 따를 수 있도록 행동했던 것입니다.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사도행전 20:27)조금도 꺼리지 않고 다 전했다는 대단한 자신감.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데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 말 가운데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했다는 말은,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성도들에게 가르쳤다는 이야기입니다. 로마서나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등 바울이 쓴 서신서들을 읽어 보면, 하나님 뜻이 어떻게 어떠한 모습으로 성도들에게 전해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것을 행하려고 애쓰고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그것들을 알아가면서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갈지를 배우게 됩니다.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인 에베소서에는, ‘우리’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옵니다. 다른 어떤 성경에 나타나는 ‘우리’보다 에베소서에 나타나는 ‘우리’에는 무게감이 있고 그 깊이가 깊습니다. 사도행전부터 이어지는 성경 내용들 가운데 ‘우리’라는 말이 나올 때 자세히 살펴보면, 사도들 자신을 지칭한 것일 때가 많습니다. 반면에 에베소서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할 때의 ‘우리’는 엄청나게 큰 의미의 ‘우리’입니다. 에베소서에는 다른 어떤 서신에 나타난 ‘우리’라는 말보다 더 큰 ‘우리’가 드러나 있습니다. 어떤 몸과 머리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그 몸은 보통 몸이 아니고 그 머리도 보통 머리가 아닙니다. (4:15-16 참조) 이런 엄청난 비밀이 에베소서에 담겨 있습니다.
에베소 장로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교훈사도 바울이 고별인사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고 말한 ‘하나님 뜻’이 어떤 것이었는지 에베소서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 있을지어다 (에베소서 1:2)
여기에서 말하는 ‘우리’에는 사도들만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 성도들을 비롯해서 지금까지의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다 들어갑니다. 바울은 당시에 전해지던 복음이 후대까지 계속 전해질 것을 알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에베소서 1:3)
여기에도 ‘우리’라는 말이 나옵니다. 고린도전서에도 ‘우리’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사도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했고 같이 움직였던 사람들을 가리켜 ‘우리’라고 한 경우가 여러 번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라는 같은 단어로 표현되었다고 해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우리’가 같은 의미는 아닙니다. 에베소서에 나오는 ‘우리’는 모든 성도를 두고 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시기 전,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던 때에 하나님께는 한 무리를 구원하실 계획이 이미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원한 교회에 대한 계획입니다. 그 교회는 이 땅 위에 존재하고 있는 특정 교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히 믿었다면 누구나 교회의 일원이 됩니다. 교회의 일원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의 지체가 되어 있습니다. 3절의 ‘우리’는 그런 우리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에베소서 1:4-5)
이 ‘우리’는 ‘우리 한국 사람’, ‘우리 미국 사람’ 할 때의 그런 ‘우리’가 아닙니다. 지구상에 있는 어떤 ‘우리’보다 큽니다. 또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다 에베소서에서 말한 ‘우리’에 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확실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만 ‘우리’에 속합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다 들어오라고 모든 사람을 부르시기는 했지만 가만히 들어온 사람은 마지막 심판 때 걸리게 됩니다. (유 1:4 참조) 하나님께서는 무엇으로 부르셨습니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고 한, 예수님의 피를 통해서만 하나님께로 갈 수 있습니다. 그 길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마 7:13) 참조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을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좁은 문을 통과하지 않고 넓은 길로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넓은 길은 사망의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베소서에 기록되어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안에서’라는 말들은 엄청난 것이고, 그 안에서의 ‘우리’는 무척 대단한 존재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아직 나지도 않았던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다 아시는 분입니다. 인류가 이 땅 위에 나기 전, 지구가 있기 전, 아무것도 없을 때부터, 아담보다 예수를 먼저 아셨던 그분께서는 예수를 세상에 보내실 것을 계획하셨습니다. 예수는 머리시고 ‘우리’는 그 몸의 지체라고 했듯이 (엡 5:30 참조),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된 인류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의 죄를 사해 주시고 우리를 끌어올리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원대한 계획이 창세전에 있었습니다.그런데 잘못 생각해서 ‘우리를 예정하셨다’는 것을 ‘만세 전부터 우리 가족을 교회 다니도록 예정하셨다. 할아버지 때부터 교회 다니게 하시고 아버지도 직분을 얻게 하시고, 나도 믿게 되었다.’는 식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우리’는 사도들과,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모든 믿는 무리를 말합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복음의 역사 속에서 믿었던 사람이라면 다 포함됩니다. 엄청나게 큰 ‘우리’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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