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지은
멕시코 형제자매들과 한 대열에 서서
멕시코 토레온. 제4회 멕시코 성경탐구모임이 열리는 컨퍼런스 룸 로비에 서성이며 만남의 반가움에 젖어 있는 멕시코 형제자매들과 새로 모여든 사람들. 그리고 현지에 흩어져 살면서 수고하는 재미교포 또는 한국에서 온 형제자매들의 바쁜 모습들... 죄를 사하시고 영원한 나라까지 이끌고 가시려는 하나님의 연회에 참석할 기회가 주어지는 시간이었다.
멕시코 성경탐구모임에는 몇 해 전부터 점점 참석자들의 수가 많아지고 있다. 여기 모인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말씀을 청종하기 위해 참석했다. 그들의 행보 뒤에는 성도들의 숨은 수고가 고스란히 배여 있다. 짚신 엮어 한 짐 짊어지고 험한 길을 걷던 우리 조상님네의 수고처럼,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나라에 말씀을 들고 와서는 힘든 행보를 디뎠던 우리 형제자매들. 나는 이제 탈 것을 이용해 머나먼 길을 쉽게 이르른 사람으로서, 낯선 땅의 집회 장소를 둘러보면서 생소한 외양을 한 큰 종족의 무리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다. 말하자면 나는 성도들의 수고 덕분에 오늘의 이 신선한 양식을 나누는 말씀의 잔치를 거저 누리고 있는 셈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어찌어찌해서 이렇게 오늘까지 모이게 되었는지, 낯선 땅에서 내가 아는 자매 형제들은 어떤 우여곡절 끝에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새 식구를 맞이하였는지 궁금해지기만 한다. 뿐만 아니라 크고 시원한 눈매, 아주 희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주 흑색도 아닌, 그러니까 황색 빛이 가미된 특이한 혼혈의 피부색은 그들의 역사 이면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광장에 서성이는 그들 가운데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이 시야에 더 많이 들어왔다. 외모로나 처지로나 그리 내 호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할 만큼 초라한 그들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스도의 한 피로써 이루어진 큰 가족이 우리 가운데 형성되어 지구 곳곳에 흩어져 있다. 우리가 생활의 굴레 속에서 쳇바퀴 돌듯 일과를 보내며 사는 가운데 얻는 성경의 의미는 다소 평면적일 수 있다. 반면, 내 가족 친지가 아닌 전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는 가운데 마음을 타고 스며드는 말씀의 의미는 한층 다각적이고 입체적이다. 우리는 구원받은 후 감사함이 워낙 커서 우리 주변뿐 아니라 길 가는 뭇 사람의 영혼, 나아가 온 세상 사람의 가련한 영혼까지를 생각하며 주님 앞에 큰 마음으로 바랐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 때 우리는 “온 세상 모든 백성 참 구원 얻도록 온 몸과 재산 드려 이 복음 전하자”고 크게 찬송했었다. 그러나 차츰 그런 감격의 시간은 뒤로 물러가고 마음이 식었을 때 현실은 다시 예전대로 나를 감싸고 매시간 무언가 나를 옥조여오는 많은 것들을 또다시 느낀다. 주님을 향해 무언가 하려고 했던 큰 마음은 이미 사라져버린 뒤였다. 그렇지만 그 시간을 우리는 잊을 수 없다. 그러기에 다윗도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달라고’ 간구하지 않았던가. (시 51:12 참조) 어떻게 그런 감격과 마음의 넓이를 다시 얻어낼 수 있는 걸까?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 (빌레몬서 1:6)
그렇다. 우리는 믿음의 교제를 통해서 그리스도께로 나아갈 수 있다. 그 교제 가운데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의미를 찬양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그로 인해 새 생명의 탄생이 일어나고, 그 가운데 수고하는 성도들에게도 은혜가 넘쳐흐르게 마련이다. 우리는 그런 일을 통해서 주님이 명령하신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 4:3) 는 말씀이 절로 이루어지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그런 좋은 일이 내게 일어나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우선 큰 가족 가운데 교제가 활발히 전개되어 새로운 일들이 일어난다든가 또 새 생명의 탄생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곳에 관심을 가져보자. 하나님께서 그 일들 가운데 분명히 뜻을 두시는데도 그것을 알고 동참하기에 게을리 하면 후일에 주님 앞에 큰 부끄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그 나라까지 인도하신 주님의 사업에 관심이 없는 나의 생활 가운데 무슨 평안과 안위가 있단 말인가!
이런 생각에 잠기는 동안 내 마음은 점점 이 나라 사람들을 향해 열리고 있었다. 예수께서 유월절 고난의 날이 다가오는 중에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요한은 기록하고 있는데 (요 13:1 참조), 우리는 우리의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우리에게 맡겨진 일은 주 안에서 말씀으로 열리는 만큼 사랑하는 일이다. 자, 여기 이제 사랑할 만한 사람들을 주님께서 보여주셨다. 우리는 그들 민족 가운데 일어났던 역사의 흔적을 짧게 살펴보고, 또 우리 형제자매들을 이 먼 곳에 사는 민족에게 보내셔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일들을 돌아봄으로써 이 땅의 백성을 향한 주님의 부르심이 얼마나 합당한 것인지 그 의미를 함께 생각해 보고 싶다.
사망의 그늘진 땅 끔찍한 종교 행사
멕시코는 스페인과 멕시코 원주민의 혼혈 민족의 나라다. 두 나라가 만나고 분리되는 기점의 역사를 상고해 봄으로써 어떻게 이 나라의 향방이 결정되었는지와 오늘의 현실을 재고해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1487년, 그러니까 콜럼부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기 몇 해 전, 멕시코에는 몽골 계통의 인디오가 강력한 종교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세상의 종말을 걱정한 나머지, 산 제물을 바치는 신성한 의식을 통해 멸망으로부터 구원되기를 기원했다. 그 해 그 나라 아스테크의 종교 지도자는 2만 명이나 되는 포로들의 살아있는 심장을 손으로 꺼내어 신전에 바쳤다. 또 포로의 남은 인육은 제사장의 식사였다. 그러나 이 일은 결국 아스테크를 멸망시키는 한 원인이 되었다.
유대인 추방령과 종교재판소 설치
그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동안 스페인에서 일어났던 두 가지 사건을 주목해 보자.
1492년 3월 30일 스페인 정부는 국내 막강한 집단이었던 유대인 15만 명에 대해 4개월 내에 나가라는 추방령을 내렸다. 또 1480년 경 이사벨라 여왕의 강력한 정부는 종교재판소를 설치하고, 그로부터 근 400년 가까이 로마 가톨릭을 모독한 이단자를 심판하고 온갖 잔인한 벌을 내렸는데, 특히 유대인이나 회교도는 대학살 또는 고문 등에 의해 수없이 희생되었다. 이런 무자비한 기관의 영향으로 나라의 산업은 마비되고 스페인은 세기를 거듭하면서 국력이 기울어갔다.
콜럼부스와 이사벨라 그리고 유럽의 꿈
그러한 때, 중세 러시아의 전설을 소재로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만든 오페라 ‘사드코’의 유명한 아리아는 벼락부자가 되고 싶어 하던 당시 유럽 서민들의 인도에 대한 동
정회원으로 가입하시면 전체기사와 사진(동영상)을 보실수 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