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북미지역 성경탐구모임 12월 30일 저녁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스가랴 12:10)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요한계시록 1:7)
성경이 전하고 있는 교훈
제가 성경을 가까이하게 된 동기 중에는 과거에 책을 읽느라 많은 시간을 보낸 것이 아깝다는 생각과 그 책들로 인해 제 기억세포 속에 담겨 있는 많은 잡티를 한번 씻어내고 싶은 마음, 이 두 가지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프로이트, 알베르트 카뮈, 니체 이런 사람들이 쓴 책들을 별 비판의식 없이 읽은 까닭에 옥석을 구별하는 능력이 제게는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전 12:12) 라는 말씀대로 이 세상에는 책이 참 많은데, 그 널려 있는 많은 책들 중에는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과 사상이 낳은 글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무심코 읽은 어떤 글이 그 사람의 영혼을 도적질하는 일도 있지요. 그래서 저는 성경을 알게 된 이후에 성경을 더욱 더 열심히 읽을 마음이 생겼던 것입니다.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서 제가 처음 발견한 것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약 1:5) 는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약 1:6-7) 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그 후 성경을 더욱 가까이하면서 다른 책들을 성경과 비교하는 힘이 조금씩 생겼고, 이제는 누구의 이론에도 휩쓸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사람의 영혼에 필요한 비누와도 같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우리 생각 속의 잘못된 부분들이 씻겨 나갑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시 1:1-2) 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런데 눈으로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자연이라는 교과서는 음악처럼 흘러가며 우리에게 무언가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마당에서 놀고 있는 병아리를 예로 들어 표현해 봅시다. 저는 어릴 때 ‘병아리는 왜 물 한 모금 마시고는 하늘을 쳐다보고 삐약 할까?’ 하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꽤 넓은 동네 마당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마당을 싹 스치는것을 보았습니다. 몸뚱이보다 날개가 더 길어요. 그림자가 있는 방향을 보니 꽤 큰 수리 한 마리가 휘익 나는데, 어디서 쫓아왔는지 암탉이 ‘콕콕콕’ 소리를 지르면서 병아리들을 그늘 쪽으로 몰고 가요. 그러더니 어미의 날개 밑으로 조그마한 것들이 ‘쪼로록’ 다 들어가 버려요. 또 한번은 수리인지 매인지 큰 새가 병아리를 낚아채는 장면을 본 적도 있었어요. 닭이나 병아리는 입술이 없어서 물을 목 뒤로 넘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늘을 쳐다보게 되어 있는데, 이러한 행동이 자연스럽게 위험한 적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자연도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사람들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세상에는 사람들에게 주는 이런 저런 교훈들이 많이 있지만, 성경은 ‘생명의 말씀’이라는 약속으로 사람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가까이함으로써 내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져 있으면, 전도할 때에 성경에 대한 이야기부터 먼저 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도를 받는 사람이 ‘네 행동이 옳아야 내가 믿지, 자기는 성경을 보지 않으면서 나더러 성경 배우러 가자고 한다.’는 비판을 할 수 있습니다. 또 말씀을 가까이하면서 전도하다가 힘에 부치면 그때 다른 형제자매들의 도움을 구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복음주의자 D. L. 무디가 어느 날 유명한 판사 부인의 방문을 받았답니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그 부인은 남편에게 전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무디 선생한테 성경 배우러 갑시다.’ 하고 남편에게 권했더니 남편이 ‘다 좋은데 당신이 마귀라서 나는 갈 마음이 없네.’ 했더랍니다. 그러자 속이 상한 부인은 무디 선생을 찾아와서, 남편에게 아무리 전도하려고 해도 남편이 마귀라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무디는 자초지종을 듣고는 ‘남편이 마귀가 아니라 당신이 바로 마귀’라고 말해 주었지요. 이번에는 무디 선생에게 기분이 상한 판사 부인이 남편한테 가서 법관으로서 한번 혼 좀 내달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남편이 ‘그 분 말씀 참 잘했다.’고 하더래요. 그리고 나중에 그 판사가 무디 선생의 강연을 듣게 되었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책에서 읽고 ‘그렇다. 전도를 받는 사람은 전도하려고 하는 사람의 행실을 먼저 본다. 우리는 성경을 가까이해야 될 책임을 가진 사람들인데,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하지 않고 잡다한 세상 이야기로 머리속을 채우고 있다면 반성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나 피곤치 아니하며 저 위험한 곳 내가 이를 때면 (찬송가 446장)
이 찬송가와 같이 영혼의 피곤과 갈함이 없이 늘 만족을 느끼고 있는지,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 (찬송가 427장) 하는 찬송이 내게서 진행되고 있는지, 이 일이 어디에서 이루어지는지 알지도 못하고 나만 낙오되어 있지는 않은지, 흑백이 분명히 가려지지 않은 회색 무대 위에 서 있지는 않은지 늘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서 욕심을 가지십시오. 가까운 친구들이나 가족 친지들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사람에게든 ‘성경 말씀에 있어서는 내가 먼저 무장되어 있어야겠다.’ 하는 그 욕심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다른 사람의 영혼을 건지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온 몸과 재산 드려 이 복음 전하자 (찬송가 273장)
우리는 예전에 이 찬송가를 많이 불렀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다른 영혼들을 구제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느냐. 내 생애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 모르지만, 내 가족은 물론 잘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의 영혼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행 16:31) 고 했으니까 ‘내 집, 내 가족부터 구원받아야 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가장 먼저는 자신과 가까운 가족이나 친지에게 신경이 많이 쓰이겠지요. 그러나 이제 한번 욕심을 내어 보십시오. 내 가족을 전도하기 어려우면 우선 다른 사람에게라도 전도를 해 봅시다. 그들이 거듭나면, 내 가족을 구원에 이르도록 도와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다른 영혼들에 대한 책임감도 그만큼 가지고 있는가.’ 조금 더 넓게 생각하십시오.
제가 성경을 알고 난 후에 얼마나 마음이 성경으로 끌려가든지. 그 전에는 성경을 하루에 한 페이지 읽으면 돈을 얼마 주겠다고 해도 못하겠다고 할 정도로 성경은 나와 거리가 먼 책이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저도 모르는 사이에 성경이 좋아져서, 누가 ‘성경을 읽으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계속 읽기 시작했습니다. 길을 걸어가면서도 성경 말씀이 생각났고 웃음이 절로 나왔어요.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찬송가 432장)
이 찬송이 정말 사실이에요.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을 가사로 표현해 놓았어요. 과연 성경이 없었다면 그런 마음이 생겼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구원받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일입니다. 이웃에 한 부자 양반이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종일 그 어른 생각이 머리속에서 맴돌았습니다.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막 10:25) 는 구절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겔 3:18) 라는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그 어른은 아주 똑똑하신 분으로 보통 때는 젊은 사람이 인사를 하면 잘 받아주시지만, 성경 이야기를 하면 당장 화를 내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 그분 생각이 나는지, 멀리 가면 잊혀질까 하여 억지로 멀리 떠나서 제가 다니지 않는 다른 교회에 갔다가 하루 지난 후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평소 아주 건강하셨던 그 부자 양반이 하룻밤 사이에 그만 돌아가셨다는 겁니다. 그 소식을 들은 저는 가슴이 두 방망이 치듯이 쿵당쿵당 뛰었습니다. 다른 영혼에 대한 책임을 회피했다는 생각에 얼마나 혼이 났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다시 떠나면 잊혀질까 싶어서 그 길로 가방에 전도지와 성경, 찬송가를 준비해서 정처 없이 남쪽으로 걸어갔습니다. 무작정 가다가 어느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해 주는 식으로 일주일을 보내며 전도하다가 집으로 돌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딤후 4:2) 는 말씀처럼 언제 어느때나 전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가족이나 친척들에게만 관심이 쏠리고 낯선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다면 문제입니다. 생각 같아서는 모든 사람이 복된 소망을 안고 살아갔으면 합니다. 모두 같은 마음을 한 번 가져 보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사람이 세운 자신의 계획은 대자연의 흐름과는 전혀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자연이라는 역사 속에 집어 던져 놓은 것은 당신이 운행하시는 이 우주 법칙 속의 하나로 우리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이 세상은 무언가 한번 도전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 세상입니다.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과 다른 새로운 것을 접했을 때에 항상 새로운 것을 느끼기 때문에 그 환경에 대해서 모험심을 갖게 됩니다. 의문을 해소하고 해답을 캐내고자 하는 바로 그 모험심입니다.
이 모험심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이 지구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 줄 아십니까? 첫 사람인 아담을 통해서 역사가 시작되어 천년이란 세월이 흐르다가 대홍수라는 이 지구상에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죄악이 가득한 것을 보시고 노아 때에 큰 심판을 내려서 세상을 물로 쓸어버린 것입니다.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벧후 3:5-6) 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지구는 원래 물에서 생성되었는데 대홍수 때 다시 물에 잠기게 된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이렇게 대변혁을 겪은 이후 새롭게 시작되었는데, 홍수 후에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 중 셈의 후손 가운데 한 사람이 뽑혀서 현재의 팔레스타인 땅인 가나안 땅으로 살러 갔습니다. 그가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곳에 들어갔을 때에 거기에는 이미 다른 가나안 족속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발붙일 자리를 얻지 못하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땅을 조금 사놓고 이집트에 내려갔다 왔는데, 그 가나안 땅이 훗날 그의 후손들의 것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마태복음 1:1-6)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자식들을 낳고 살았습니다. 여기서부터 이스라엘 왕족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한 역사 속에서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 유다를 통해서 이상한 역사가 흘러갔습니다.
저는 성경 읽다가 성경에 나오는 이름을 보고서 ‘참 희한하다’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할 때 아브라함이 낳은 아들 중 이스마엘은 이삭보다 빨리 태어났지만 떠났고, 이삭이 낳은 아들 중에서도 형 에서는 동생 야곱보다 먼저 태어났지만 떠났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끝에서 두 번째 아들인 요셉이 다른 형들에 의해 이집트에 팔려가게 되었을 때, 그를 사간 사람이 하필이면 이스마엘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할아버지 대의 배다른 자손이 그를 사서 이집트에 팔았습니다. 참 묘한 일이지요?
그 이야기 속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또 있습니다. ‘우리가 요셉을 죽이지 말고 저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아버리자. 요셉을 죽인들 우리에게 무슨 덕이 있느냐.’ 이렇게 그의 생명이라도 구하려고 팔자고 한 형의 이름이 ‘유다’예요. 그런데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 돈에 욕심이 나서 예수를 판 사람이 누구입니까? 유다지요.
아브라함의 처 중에 한 사람은 이스마엘을 낳은 하갈입니다. 이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준 사람은 누구입니까? 사라지요. 사라는 바울 사도가 “곧 우리 어머니라” (갈 4:26) 한 대로‘새 예루살렘의 그림자’입니다. 그리고 땅에 있는 예루살렘은 바로 하갈과 같다는 뜻으로 설명이 되고 있는데, 하갈의 아들 이름이 이스마엘입니다. 사도 바울이 활동하던 시기에도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바울이 발표하고 있는 교회의 역사에 함께 하고 있는 무리이고, 다른 한 부류는 이삭을 미워하던 이스마엘과 같이 그들을 미워하고 박해하던 사람들입니다. 바울 자신이 복음을 깨닫기 전에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러 쫓아다니던 행동은 마치 이스마엘의 행동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왜 창세기에서는 그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요셉이 팔려 갔다는 이야기를 했을까요? 의미심장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을 좀 읽은 사람은 이 이야기를 읽으면 무언가 감이 잡히는 것이 있을 거예요. 그러나 성경을 멀리한 사람은 이것이 무슨 말인지 모를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과 요셉
아브라함의 후손들 중 이삭이 야곱을 낳았고, 그 야곱이 낳은 열두 아들들이 이스라엘 민족, 열두 지파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아브라함부터 시작되었는데, 이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원래 야곱의 이름입니다. (창 32:28 참조) 그리고 야곱의 아들 유다가 ‘요셉을 죽이지 말고 팔아버리자’고 해서 그 민족들이 살아남게 되었는데, 그의 이름을 따서 유다 민족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야곱의 후손들을 유대인 또는 이스라엘인이라고 부르지요?
그런데 왜 그 민족의 이름을 아브라함의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야곱의 이름인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고, ‘유다’라는 야곱의 아들의 이름으로 부를까. 이것도 보통 일은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과, 이삭의 아들 야곱 다음부터 새로운 역사가 진행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팔레스타인 땅에 살던 야곱의 가족이 모두 기근으로 인해 이집트로 간 후에 가나안 땅, 즉 이스라엘 땅은 통째로 비워진 채 사백 년의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그 이전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창 12:7) 고 하셨고,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창 15:13, 16) 하는 약속도 해주셨습니다. 그 땅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그대로 서려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네들의 유골이 묻혀 있기도 했습니다.
사백년 후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를 탈출해 가나안 땅으로 향했습니다. 또 다시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이스라엘 민족은 앗수르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에도 그렇게 나라가 비어 있었습니다. 후에 이스라엘 민족이 조금씩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일이 있고 나서, 말라기 선지자 이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까지 약 사백 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선지자가 없었습니다. 구약의 기록과 신약 성경의 기록 사이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셨던 사백 년의 시간이 또 다시 흘렀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바로 영원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하나의 프로그램이 이 지구에 펼쳐진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 속에 하나님이 자신의 계획을 삽입시켰어요. 하나님께서는 세계 여러 종족과 민족이 나뉘어지는 역사의 흐름 속에 한 민족을 개입시킴으로써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되게 하셨습니다.
어릴 때 성경을 배우면서 ‘홍전, 홍후, 족, 노, 유, 간, 사’라고 외웠는데, 홍수 전, 홍수 후, 족장시대, 노예시대, 유랑시대, 가나안 정복시대, 사사 시대를 말합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야곱을 통해서 크게 전개되었습니다. 야곱 전의 아브라함과 이삭 대에는 아들이 생길 가능성이 별로 없었던 어려운 때였습니다. 야곱은 욕심도 많고 꾀도 많은 사람이었는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이 야곱에게서 태어난 아들들 중에 뜻밖의 일을 당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집트에 내려가서 산 요셉입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합시다. 창세기 37장부터 47장까지의 내용입니다.
37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 아비의 우거하던 땅에 거하였으니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
●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그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그가 그 꿈으로 부형에게 고하매 아비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너의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모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
● 그 형들이 세겜에 가서 아비의 양 떼를 칠 때에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지 아니하느냐 너를 그들에게로 보내리라 요셉이 아비에게 대답하되 내가 그리하겠나이다 이스라엘이 그에게 이르되 가서 네 형들과 양 떼가 다 잘 있는 여부를 보고 돌아와 내게 고하라 하고 그를 헤브론 골짜기에서 보내매 이에 세겜으로 가니라 어떤 사람이 그를 만난즉 그가 들에서 방황하는지라 그 사람이 그에게 물어 가로되 네가 무엇을 찾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나의 형들을 찾으오니 청컨대 그들의 양 치는 곳을 내게 가르
로그인하시면 전체기사와 사진(동영상)을 볼수 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