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온 유리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것같이 너희 형제에게도 안식을 주시리니 그들도 요단 저편에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주시는 땅을 얻어 기업을 삼기에 이르거든 너희는 각기 내가 준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신명기 3:20)
1편 요단강을 건너서
22장
1939년 여름, 폴란드 바르샤바
도브 란도우의 아버지 멘델 란도우는 그저 평범한 빵가게 주인이었다. 카렌의 아버지 요한 클레멘트 박사와는 사회적으로나 재정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양극에 서 있었다. 두 사람에게는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점 외에 단 한 가지도 공통점이 없었다. 요한 클레멘트 박사는 독일에서 사는 동안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잊고 지냈지만, 멘델 란도우는 아니었다. 한 순간도 유대인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폴란드의 유대인은 7백 년간 줄곧 학대에서 대량 학살에 이르기까지 가지가지 탄압의 대상이 되어왔기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은 처음 십자군의 박해를 피해 폴란드로 왔다. 그들은 성스러운 정화의 칼날을 피해 독일, 오스트리아, 보헤미아에서 폴란드로 왔다. 그 순간부터 온갖 수모와 박해가 시작되었다. 유대인은 외딴 민족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누런 헝겊 표지를 차야 했다. 유대인 탄압을 목적으로 하는 무수한 신분령과 법률이 성문화 되었다. 유대인은 게토의 벽 속에 갇혀서 사회에서 격리됐다. 격리된 속에서도 주기적으로 습격을 당해 죽거나 재산을 빼앗기곤 했다. 심지어 폴란드인들은 비가 오면 홍수의 책임을 비가 안 오면 가뭄의 책임을 유대인들에게 덮어 씌워 못살게 굴었다.
멘델 란도우는 단순하고 지극히 온순한 사람이었다. 그의 아내 리아도 극히 단순한 여자였고 부지런히 일하는 현모양처였다. 그는 종교적으로 그리 열심 있는 편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부활절과 크리스마스를 지내듯 유대교의 휴일을 평범하게 지냈다. 그는 성경을 신앙의 바탕이라기보다는 자기 민족의 이야기를 적어 놓은 역사책이라는 가치를 두고 받아들였다. 그러니 그는 아이들에게 뿌리 깊은 신앙심 같은 것도 물려 줄 수 없었다. 멘델 란도우가 아이들에게 물려 준 것은 아득한 꿈같은, 비현실적인 생각 한 가지였다. 그것은 언젠가는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유대인만의 나라를 다시 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폴란드의 유대인 가운데서 멘델의 존재는 특이한 것이 아니었다. 폴란드 안에 있는 350만의 유대인 가운데 수십 만은 같은 생각을 하며 살았는데 시오니즘의 샘은 바로 이들 사이에서 솟아났다. 시온주의자들 가운데는 종교적인 집단, 노동자 집단, 투쟁적인 집단, 중류 계급의 상인 집단들이 있었다. 멘델은 빵가게를 운영한다는 이유로 노동조합에 가입했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의 가족은 스스로 개혁파라는 이름을 붙인 시온주의자의 노동단체 회원이 되었다. 란도우네 가족의 사회생활은 철두철미하게 이 개혁파를 중심으로 해서 돌아갔다. 팔레스타인에서 설교하러 오는 사람들도 때때로 있었고, 새로운 회원을 모집하는 일과 그 생각을 지탱시키기 위한 서적, 팜플렛, 토론, 노래, 춤, 그리고 끝없는 희망이 있었다. 개혁파에서도 다른 시온주의 단체와 마찬가지로 소년 소녀들에게 토지의 경작법을 가르치는 농업 훈련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가끔 한 무리씩의 사람들을 팔레스타인으로 보내어 새로 구입한 토지를 경작하게 했다.
란도우네 식구는 여섯 사람이었다. 멘델과 그의 아내 리아, 그리고 큰 아들 문데크. -문데크는 몸집이 큰 열여덟 살의 소년이었는데 그 역시 빵 굽는 일을 했다. 지도자로서의 소질을 타고난 문데크는 개혁파의 반장 일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딸이 둘 있었는데, 열일곱 살 된 루스는 어머니 리아를 닮아 몹시 수줍은 소녀였다. 루스는 개혁파 지도자의 한 사람인 얀을 사랑했다. 또 열 네 살의 레베카와 집안의 막둥이인 어린 도브가 있었다. 금발에 큰 눈을 가지고 있는 열 살의 도브는 개혁파의 회원이 되기에는 너무 나이가 어렸다. 도브는 형 문데크를 몹시 존경했고, 그가 회합에 갈 때마다 따라가곤 했다.
1939년 9월 1일
연달아 국경 분규를 조작해 내고 있던 독일군이 폴란드에 침입했다. 멘델 란도우는 큰 아들 문데크와 함께 군대에 들어갔다. 독일군은 불과 26일 만에 폴란드를 산산조각 냈다. 멘델 란도우는 폴란드의 군복을 입은 3만 명의 다른 유대인 병사들과 함께 전사했다. 란도우네 가족들은 때가 때인지라 슬픔에 잠겨 있을 겨를도 없었다. 문데크는 과감했지만 소용없었던 바르샤바 방위전에서 란도우 일가의 가장이 되어 돌아왔다. 개혁파는 다른 도시에 있는 개혁파들과 손을 잡고 저항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문데크는 만 열아홉 살도 안 됐지만 군사 지도자가 되었다. 루스가 사랑하는 얀은 문데크의 부사령관으로 임명됐다.
독일군이 정권을 맡고 한스 프랑크가 총독이 된 순간부터 유대인을 대상으로 하는 일련의 법률이 선포되었다. 예배는 금지되고 여행은 제한되고 세금은 과중하게 부과됐다. 유대인은 공무원직이든 피선거직이든 모든 공공부서에서 추방되었다. 유대인은 빵 배급을 받는 줄에 설 수 없었고, 공공장소에 나가지 못했다. 또 학교에서 추방되었다.
란도우네 일가에게는 고난의 나날이었다. 멘델 란도우의 죽음, 수십 개의 게토 부활의 소문, 독일 당국의 진주 계획, 물자의 부족. 이런 것들 때문에 삶은 몹시 괴로웠다.
1940년 초 어느 날 아침, 란도우네 집 문에 노크 소리가 났다. 독일군과 협력하고 있는 푸른 제복의 폴란드 경찰이 밖에 서 있었다. 그들은 리아 란도우에게 불쑥 두 시간 안으로 짐을 꾸리고 유대인 거주지로 정해진 바르샤바의 다른 구역으로 옮겨가라고 했다. 집에 대한 보상금은 없을 것이고, 리아가 20여 년의 결혼생활에서 모은 물건들을 추릴 여유도 있을까 말까 했다. 란도우네를 비롯한 바르샤바의 유대인 가정들은 시 중앙의 철도 간선 부근의 어느 구역으로 전출했다. 각 지방에서 유대인들이 몰려들었다. 꾸역꾸역 모여든 유대인의 수는 50만 명을 넘었다. 그 때 새로운 집단구역 주변에 벽돌담이 쌓이기 시작했고, 그 위에 철조망이 쳐졌다. 게토가 부활한 것이다!
게토에서 담 밖으로 나가는 길은 완전히 막혔다. 밖에 일터를 갖고 있던 문데크는 실직자가 됐다. 게토 안에서 배급되는 양식은 그 안의 인구의 반도 못 먹일 정도로 줄었다. 양식을 얻을 가능성이라도 있는 사람은 ‘노동’ 카드를 가지고 여남은 개 되는 강제 노동대나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의 가족들뿐이다.
새 게토가 생기자 사람들은 공포에 휩쓸렸다. 일부 유대인들은 재산을 양식과 바꾸기 시작하고 또 일부는 기독교인들의 가정으로 피신할 길을 찾았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도망하려던 자는 담 밖에서 죽음을 당하거나 배신을 당했다. 담 안쪽의 생활은 하루하루 생존을 위한 싸움으로 변했다.
문데크는 지도자로서 등장했다. 개혁파 사회에서 차지하는 지위 때문에 그는 유대인 위원회로부터 몇 군데 안 되는 게토 내의 빵 공장 하나를 경영하는 허가를 얻었다. 이렇게 단결된 행동을 통해 그의 집단은 겨우 목숨을 유지하고 먹을 것을 얻을 수 있었다.
게토 안의 생활도 어두움으로만 찬 것은 아니었다. 아주 우수한 교향악단이 매주 연주를 하고, 학교는 예정대로 운영되고 또 작은 극단들이 조직되었다. 원하면 언제나 토론회에 낄 수 있고 강의를 들을 수도 있었다. 게토 신문이 한 가지 나오고 게토에서 발행한 돈이 물건을 사는 합법적인 수단이 되었다. 비밀 예배도 열렸다. 이러한 예배와 활동들을 지탱시키기 위한 중심 역할은 개혁파에서 했다. 어린 도브는 개혁파의 활동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싶어 했으나, 가족들은 될 수 있는 대로 공부를 시키려고 그를 학교에 보냈다.
1941년 봄
폴란드 침략 18개월 후에 아돌프 히틀러는 유대인 문제 해결의 최종 답안을 내렸다. 민족 말살이었다.
전출입 전문가인 나치 친위대의 아이히만 대령은 유럽의 지표에서 유대인을 제거하는 책임을 맡았다. 수개월 안으로 아인사츠코만도 행동대는 아인사츠그루펜 특별 행동단으로 편성되었다. 이 행동단은 유대 민족 근절의 사명을 띠고 폴란드, 발틱 제국, 소련 점령지구를 휩쓸었다. 그들은 유대인을 검거해서 외딴 곳으로 데려가 그들 자신의 무덤을 파게 했다. 그리고 옷을 벗긴 후 무덤가에 무릎을 꿇게 하고 머리에 총을 대고 쐈다. 소련 키에프 시 교외 바비 야르에서는 이틀 동안에 3만 3천 명의 유대인을 체포한 후 엄청나게 큰 움들을 파놓고 그 옆에서 총살을 감행한 것이 특별 행동단 활동의 절정이었다. 바비 야르 대학살은 우크라이나 인들의 갈채 속에서 진행되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을 죽이기에 그것은 턱없이 부족했다. 아니, 한 민족을 근절하는데 총살은 속도가 너무 느렸다. 그래서 아이히만 파울, 블로벨, 히믈러 등 나치의 최고 간부들은 유대인들을 대량으로 살상할 수 있도록 계획을 수정, 보완했다.
1941년 겨울
게토에서는 바비 야르에서 죽은 사람의 수가 무색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사람들은 수십 명씩, 수백 명씩, 수천 명씩 굶어 죽거나 얼어 죽었다. 허약해서 울음소리도 못 내는 갓난애들과 기도를 올릴 힘도 없는 늙은이들이 수백 명씩 죽어갔다. 아침마다 게토의 거리거리는 새 시체들로 덮였다. 위생반은 삽을 들고 거리를 다니면서 시체를 손수레 위에 쌓아 올렸다. 갓난 애, 어린이,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두툼히 쌓아 올려 화장터로 실려 가서 화장됐다.
도브는 열한 살이 됐다. 그는 문데크네 빵 가게가 문을 닫게 되자 양식을 구하러 다니느라고 학교를 그만두었다. 도브는 살아남는 꾀를 게토의 생활에서 배웠다. 그는 교활한 짐승처럼 쏘다니다가 귀를 기울이고는 재빠르게 행동을 했다. 란도우네 밥솥은 오랫동안 빈 채로 있었다. 식구들이나 다른 개혁파 사람들이 음식을 한 끼도 마련할 수 없게 됐을 때 리아는 숨겨두었던 보석 한 개를 양식과 맞바꾸었다. 길고 괴로운 겨울이었다. 닷새 동안을 굶은 뒤에 란도우네 식구들은 밥을 한 끼 먹었는데 그 대신 리아의 손목에서 결혼 팔찌가 자취를 감추었다.
루스는 열아홉이 되었다. 그 해 겨울 얀과 결혼했을 때, 루스는 너무 말라서 도저히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란도우네 식구 네 사람과 얀네 식구 세 사람이 함께 있는 단칸방 안에서 신혼 기간을 지냈다. 그러면서도 이 젊은 한 쌍은 저희들 끼리만의 시간을 어디선가 찾은 모양이었다. 봄이 되자 루스는 임신을 했다.
개혁파의 지도자로서 문데크가 해야 할 일의 하나는 외부와 연락을 취하는 일이었다. 그는 하수도를 통해 담 밑으로 게토 안팎을 왕래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폴란드인 깡패들이 도망해 나온 유대인들에게서 금품을 약탈하거나 당국에 넘겨주고 상금을 타려고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바르샤바로 나간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개혁파는 회원 다섯 사람을 잃었다. 모두 담 밖에서 잡힌 사람들이었다. 깡패들에게 체포되어 게슈타포에 인계되었다가 교수형에 처해진 회원들 중 한 사람은 루스의 남편, 얀이었다.
어린 도브는 살아남는 여러 가지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문데크에게 하수도로 드나드는 연락원 노릇을 시켜달라고 말했다. 문데크는 처음에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지만, 도브는 계속 고집을 부렸다. 그는 금발과 푸른 눈 때문에 겉모습이 다른 누구보다도 유대인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나이도 어리고 해서 의심도 제일 덜 받을 것 같았다. 문데크는 동생이 빈틈없고 재빠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차마 그런 일을 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이틀 동안에 두 명의 연락원을 더 잃게 되자 그는 비로소 도브의 청을 받아들였다. 문데크는 어차피 모두들 매일 죽음과 맞닿아 있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리아도 이해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브가 게토의 가장 우수한 연락원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는 담 밑으로 통하는 길을 여남은 개 마련해 놓았다. 그는 바르샤바의 땅 밑을 악취를 풍기며 흐르는 미끈미끈한 썩은 물속을 마음 놓고 다녔다. 매 주 도브는 어깨까지 오는 더러운 물속에 잠겨 어둠 속을 왕래했다. 담 밑으로 나서면 그는 완다라는 여자가 사는 자브로스카 99번지의 어느 아파트로 갔다. 그는 밥을 한 끼 먹은 후 권총, 탄환, 돈, 무전기의 부품, 그리고 다른 게토의 소식, 빨치산의 소식 등을 가지고 하수도로 돌아왔다.
도브는 이런 여행을 하지 않을 때면 문데크와 누나 레베카가 주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개혁파 본부에 갔다. 레베카는 여행증명과 여권을 위조하는 일을 했다. 도브는 그것을 구경하기를 즐겼고 얼마 안 가서 레베카와 함께 일을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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