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를 읽으면서 - 2006년 1월 21일 강연
이 소리는 ‘빌립보서를 읽으면서’ 2006년 1월 21일 강연을 정리한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2:5-8)
사망이 이끄는 인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가다가 밝은 빛 홀연히 보고 (찬송가 208장)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하면 절벽 아래나 산속 계곡 깊은 곳 등을 상상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성경에는 “사망이 저희 목자일 것이라” (시 49:14) 는 말씀이 있습니다. 죽음이 사람을 양 떼같이 몰고 간다는 말입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인류 역사 초기에 첫 사람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창 2:17) 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이후, 인생은 죽음을 맛보게끔 태어났습니다. 모든 인생은 죽음으로 치닫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언젠가 죽습니다.
저는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해 봅니다. 내가 죽을 때는 어떠할까? 죽음은 우리에게서 그렇게 멀리 있지 않습니다. 사람은 언젠가 한 번은 죽음을 맞습니다.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 무엇 하러 태어났느냐고 물으면 대답을 못하면서, 죽으려고 태어났느냐고 다시 물으면 싫어합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히 9:27) 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릴 때 이런 이야기의 동화책을 읽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너무 오래 살아서 문제가 생겼는데 알고 보니 염라대왕이 출석부에 이름을 빠뜨려서 저승으로 못 부른 것이었답니다. 그래서 ‘나도 그렇게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했던 때도 있었는데, 나이가 들어서인지 지금은 너무 오래 살면 안 되겠다 싶습니다. 저 혼자 나이 들어 오래오래 살아도 친구나 가족들은 죽고 없을 테니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적당하게 살다가 마치는 것이 가장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며칠 전 뉴스에서 67세 된 노인이 아이를 낳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최고령 산모라더군요.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 보니 이삭이 태어났을 때 아브라함은 백 세였고 사라는 구십 세였습니다. 오랜 옛날에는 사람들이 요즘보다 더 오래 살았습니다. 최근에 와서는 의학의 발달로 10년 전보다는 수명이 늘었습니다.
그러나 오래 산다 해도 할 일이 없다면 그것만큼 지루한 것도 없을 것 같습니다. 가끔 TV 화면에서 노인들이 공원에 모여 앉아 있는 모습이나 중절모를 쓰고 지팡이를 들고 가만히 앉아 있거나 바둑을 두고 있는 모습들을 보면, 저는 거기에 섞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생각을 한다고 해서 제가 노인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젊은이들이 노인들보다 꼭 오래 사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저런 사고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죽어 가는지 모릅니다. 1970년대 초반 제가 대구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제가 조금 아는 한 청년이 자기 상점 앞을 지나가는 노인을 보며 ‘저 노인 참, 지루할 정도로 오래 산 것 같다.’ 는 푸념 섞인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안 되어 이 청년이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전봇대에 부딪쳤고, 자꾸 어지럽다는 말을 하더니 결국 그 날 죽어버렸습니다. 아주 젊은 청년이었습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 인생은 마치 계약을 맺은 것처럼 죽음을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은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지만 인생에게 꼭 한 번은 옵니다. “사망이 저희 목자일 것이라” (시 49:14) 는 이 말씀은 우리 모두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몸 안에 있는 나, 이런 이야기를 하면 ‘몸이 나지, 뭐.’ 라고 생각하시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몸은 이 자리에 있어도 생각은 저 멀리 고향집으로 갈 수 있습니다. 우리 생각은 상당히 많이 움직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나라는 생명을 의식하는 내가 몸 밖으로 나가는 것을 죽음이라고 합니다. 죽음 앞에서 ‘죽음은 나와 먼 이야기다’ 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망의 바람에 이슬 같이 되나 나의 귀한 목숨 영원일세 (합동찬송가 562장)
사망의 바람에 이슬 같이 된다. 끝나 버린다.저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 성격대로 살고 인간으로서 잘못도 많이 저지르고 사는 나라는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수준 이하의 사람이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 봅니다. 그러면서도 참 다행인 것은 그런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몰랐다면 무슨 낙으로 살았을까? 무슨 희망을 가질 수 있었을까?
스무 고개의 나이를 넘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그 스무 고개를 세 번이나 넘겼으니, 세월이 얼마나 빠른지 모릅니다. 이제 제게 남은 날들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죽음 앞에서 여러분은 어떤 자세로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까? 작년에 저는 달력을 한 페이지도 보지 않았습니다. 그저 옆 사람에게 ‘오늘이 며칠이지?’ 하고 물었을 뿐입니다. 그러다가 올해 새 달력을 보며 ‘아, 저 날을 다 채우기 전에 끝날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라는 인생이 어느 달력에서 멈출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그런 상태에서 살고 있습니다.
뜻밖에 일어날 ‘나타나심’그러한 인생을 사는 우리는 종종 생각지도 못했던 누군가가 나타났다든지 하는 뜻밖의 일을 겪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 그 ‘나타남’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 것에 대해 생각 없이 살아간다면 그대로 아무 의미 없이 지내게 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는 무언가 ‘나타난다’는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들이 자율학습을 하는데 갑자기 선생님이 나타났다든지 하는 것 말입니다. 제가 어릴 때의 일인데 어떻게 하다 보니 학교에서 내준 숙제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날은 ‘선생님이 학교에 안 오셨으면 좋겠다, 친척집에 무슨 일이 생겨서 안 오시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옆의 친구에게 물어보니 자기도 마찬가지랍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갑자기 선생님이 나타나셔서 숙제 검사를 하셨습니다. 이런 것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 삶에 대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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