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6. 2 강연
그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말라기 3:16)
예수님의 두 모습을 통해 보는 우리 모습
구원받은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성경을 상고하는 것은, 내키는 대로 살다가 일주일 중에 하루 교회라는 곳에 가서 마음에 없는 기도를 하고 주어지는 성경 말씀을 듣는 종교인의 생활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혹시 그런 식으로 우리가 듣는 말씀을 대하고 살지는 않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 5:39) 라고 말씀하셨듯이, 성경 속 모든 말씀들은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성경은 자의적으로 해석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의 내용들 가운데에는 우리가 오해할 만한 내용들이 많습니다. 구약 성경이 보여 주는 역사는, 우리 생활 방식이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와는 거리가 먼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서 아주 오래 전에 이루어진 일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4천 년 전부터 2천 년 전까지 이스라엘의 파란만장한 역사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이방인인 우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피가 섞여 있지 않은 우리들은 은혜의 시대를 살면서 성경을 접했고, 성경을 통해 마음에 빛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어떤 거울보다 깨끗한, 성경이라고 하는 말씀의 거울 앞에서 내 자신을 들여다보고 그 속에서 내가 살아가야 할 방법과 취해야 할 행동에 대한 교훈을 받습니다.
성경 말씀 가운데에는 어느 개인이나 단체를 지칭해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한 내용은 별로 없습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내게 교훈이 되기도 하고, 유대인에게 주어진 말씀이기도 하면서 교회에게 주어진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삶을 하나님 손에 맡겨 놓았다면, 우리는 사람이 하는 얄팍한 소리들에 귀를 기울일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전쟁이라는 것은 TV에서 보는 것 같은 그런 전쟁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 내가 듣는 이야기, 내가 알아가는 성경 말씀, 내가 하는 말, 내가 행하는 많은 잘못된 행동과 또 잘된 행동들, 이런 것들이 내 마음속에서 싸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로마서만 보아도 그런 것들이 훤히 보입니다.
저는 열일곱 살에 대한민국을 떠났습니다. 떠나는 날까지 고향을 떠나 살아 본 적이 없었고, 비행기도 타 본 적이 없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미국 땅을 밟았는데 지금 되돌아보면 그 나라에서 오랜 시간을 살고 이사도 많이 다녔으면서도 ‘여기가 내 집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성경에는 유대인들이 가나안 땅을 떠나 여기 저기 떠돌아다니며 답답한 세월을 보내는 내용이 있는데, 그런 구약 성경의 이야기들을 떠올려 보면 그래도 나에게 ‘고향’이라는 것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말하는 고향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내가 태어난 곳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내 영혼의 고향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형제자매들과 함께하는 교제가 제 고향입니다. 유대인들은 세상 어느 곳에 흩어져 있어도 성전을 향해 마음을 두고 살았습니다. 그처럼 형제자매들과 매일 함께 지낼 수는 없더라도 저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마음의 고향이 있어서 좋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과 우리가 다니는 발걸음, 우리의 생각 가장 중심에는 예수님이 서 계십니다. 교회에게는 복음이 맡겨져 있고, 그것을 지키기 위한 많은 일들이 주어져 있습니다. 사람 속에는 영혼이 있고 정신이 있는데 그것을 보호하고 그 뜻을 행하기 위한 육체의 행동도 있듯이, 교회 속에는 많은 일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종교인들처럼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서 설교를 듣고 각자 알아서 생활하다가 그 다음 주에 또 설교를 들으러 모일 것 같으면 구약 성경 속에 나타나는 이스라엘도 필요 없습니다. 오로지 성전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저는 열왕기서, 그리고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를 자주 생각합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에스라는 성전이 다시 지어질 즈음, 율법과 말씀을 잊어버리고 살았던 유대 민족을 깨우쳤던 사람입니다. 또 느헤미야서에는 예루살렘에 성곽을 짓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보면 ‘정말 그렇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도 한쪽에서는 계속해서 복음이 전해지고 있고 구원받는 사람이 생기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수가 많고 적음을 단순히 숫자로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내 개인이 구원받았을 때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내가 변화 받았던 그 순간, 그 후에 나에게 일어난 변화, 많은 시련들과 많은 축복들, 우리의 그 경험들을 이제 구원받은 형제자매들도 똑같이 겪어갈 것입니다.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큰일이겠습니까? 복음이라는 것이 구원받은 사람과 교제의 입을 통해서, 또 손을 통해서, 또 노력과 봉사를 통해서 계속해서 전해지고 있고, 또 우리는 그것을 거들기 위해 많은 일들을 해나갑니다. 그러한 모습들이 구약 성경에도 계속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먼저는 예수님임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 중심에서 벗어나면 성경을 오해하게 됩니다. 우리 개인의 일이나 운명은 예수님의 뜻하신 바대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구약 성경이 우리에게 미리 보여 주는 것이며, 신약 성경은 그것에 대해서 화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먼저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예수님이 세상에 태어나셔서 죽으신 이야기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 나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장에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때를 중심으로 해서 2천 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고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예수께서 이 세상에 한 번 더 서시는 날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에는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11) 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던 때의 모습과 훗날 이 세상 많은 사람들 앞에 왕 중 왕으로 서실 때의 모습, 그 두 모습이 성경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알아가는 중에는 반드시 고난 받으신 예수님과 영광을 얻으시는 예수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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