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목 | 대구
제 어머니 성함은 최태수입니다. 2007년 현재 78세이십니다. 지난 4월 22일 어머니께서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기력이 너무 떨어지셔서 신장에 세균이 침입해 열이 조절되지 못하는 상태라며, 병원에서는 신우신염이라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그전까지는 혼자서 별 문제 없이 활동하셨는데 연세가 많으셔서 그런지 아직까지 회복되지 못하셔서 현재는 요양원에 계십니다. 글은 겨우 읽으실 수 있지만 쓰는 것은 너무 어려우셔서 부득이하게 딸인 제가 어머님이 이야기하고 싶으신 간증을 대필하게 되었습니다.
18살 차이의 남편을 만나 대구에 자리 잡고
제 어머니는 경상북도 고령군 개진면 반운리에서, 절에 열성을 내시는 어머니와 매우 점잖은 성품을 가지신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어머니는 마음이 여리고 부지런하셔서 부모님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일본의 압박을 받고 있었던 터라 18세가 되면 무조건 끌려가야 했기 때문에 그것을 면하려고 서둘러서 혼인을 하게 되셨지요. 그리고 전라북도 정읍이란 곳으로 젊디젊은 신혼시절에 행상을 나섰답니다. 그곳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있던 중 남편은 낯선 몇 명의 청년들을 따라가더니 그 길로 아예 소식이 끊어져 버렸지요. 어머니는 주막에 묵고 계셨는데 돈도 다 떨어지고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와중에 설상가상으로 장티푸스라는, 당시로서는 혹독한 전염병을 앓게 되어 머리도 다 빠지고 거의 사경을 헤매는 상태가 되었답니다.
그러던 중에 경상도 할머니 한 분이 “젊은 사람이 부모 얼굴도 못 보고 머나 먼 객지에서 다 죽게 되었으니 이런 딱한 일이 있나.” 하시면서, 죽을 끓여 가져다주기도 하셔서 차츰 병에서 몸을 추스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소식이 끊긴 남편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는데 그 상태를 보다 못한 할머니께서 재가를 권유하셨다는군요. 그런데 그날 밤 어머니의 꿈에 새로 만나게 될 남자 분(현재의 제 아버지시지요)이 보이셨다고 합니다. 다음날 소개 받은 사람을 만나 보니 꿈에 본 그 사람이 왔더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새로 만난 남자를 따라 집에 가 보니 얼마나 살림이 가난한지, 밥을 지으려고 솥에 물을 부었더니 쇠로 만든 솥 밑에 구멍이 나서 물이 새고 있더라고 하셨습니다. 아들 하나, 딸 하나에 시어머니도 두 분이나 계셨습니다. 손이 귀한 때라 아들이 없는 어느 집의 양자로 들어가서 생긴 양시어머니도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사는 식구가 모두 6명인 셈이었지요. 어려운 가계를 꾸린다고, 날마다 바쁜 생활을 하시느라 6년이란 시간을 보내고서야, 그제야 저를 낳으셨다고 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이가 18살이나 차이 나십니다. 제가 3살 되던 해쯤에 오빠 되시는 분이 결혼을 하셨는데 할머니께서 손자며느리를 지나칠 정도로 귀여워하시면서, 그동안 어머니께서 베를 짜고 논밭을 일구어 조금 불어난 재산 분배까지 서두르는 것이 너무 억울하셔서 어린 저를 떼어놓고 서울로 돈을 벌겠다며 가셨답니다. 서울에서는 남의 집 아이한테 젖을 먹여 키워 주는 젖 유모 일을 하셨는데 도저히 제가 마음에 걸려서 얼마쯤 그 일을 하시다가 그만두고 두부 공장에 취직하셨답니다.
그때 아버지께서 저를 데리고 갔었지요. 어렴풋한 제 기억 속에도 아버지와 함께 사람들이 북적대며 왔다갔다하는 곳을 지나쳐서 차를 탔던 것 같은 아련한 기억이 있습니다. 두부 공장에서 살림할 수 있는 방을 한 칸 주신 것 같습니다. 그곳에 오래 있으면 한 밑천 톡톡히 주시겠다고 사장님이 약속하셨다는데도 외가댁에서 내려오라고 하셔서 서울 생활을 접고 외가댁으로 내려가게 되었지요. 그리고 저를 외가댁에 맡겨 놓고 부모님은 대구로 가셔서 서문시장에서 노점을 하나 얻어 음식 장사를 하시게 되었답니다.
제 아버지는 정읍에 계실 때 민요를 배우셔서 창을 잘 하셨습니다. 정읍에서는 회갑연이나 칠순 같은 큰 잔치에는 창을 잘 하시는 분들을 모셔서 잔치의 흥을 돋우고 끝나면 봉투에 수고비를 넣어서 주셨답니다. 그런데 지인도 하나 없는 타지인 대구에는 아버지의 실력을 알아줄 만한 사람이 없어 아버지는 짐을 옮기는 일도 하시고 솜사탕 장사도 하셨지만 모두 오래 하시지는 못하셨습니다. 친구도 없으시니 그저 술을 드시는 것이 유일한 낙이셨다고나 할까요.
신출내기 무당이 되어
어머니는 제 아래로 여동생 둘을 낳으셨는데 딸만 셋이니 아들 낳기를 소망하시는 어머니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정월이 되면 절에도 가시고 토정비결도 보시고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무당을 찾아가 점괘를 보곤 하셨습니다. 그러시다가 그렇게 소망하는 아들을 낳으셨습니다. 아이는 인물도 출중했으며 영특했습니다. 아이를 데리고 길을 거닐 때면 길 가던 사람들이 “그 놈 참 잘 생겼구나.” 하며 번쩍 올려 안아주시기도 자주 하셨지요. 이런 아이였으니 제 어머니의 기쁨이란 말로 다 할 수 없는 정도였을 것입니다. 저도 그 남동생을 아주 예뻐하고 좋아하면서도 어머니가 그러시는 것을 옆에서 보면 질투심이 날 정도였으니까요.
그렇게 어머니에게 있어 꿈이요 희망이었던 그 아이가 4살이 되던 해에 감기를 앓게 되었는데, 도무지 낫지 않아 병원에 갔더니 ‘결핵성 뇌막염’ 이라는 것입니다. 이 병을 앓으며 1년 동안 온갖 좋다 하는 것들은 다 해 보았으나 효험도 없이 아이는 그만 하늘나라로 가 버렸습니다.
저는 숨어서 울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아이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셨고 혼란스러운 중에 또 여동생 두 명을 더 낳으셨습니다. 그때까지도 어머니는 죽은 자식을 잊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며 불교 계통의 종교들을 찾아다니셨습니다. 원불교와 천리교, 대한불교, 진각종, 심인당 등 여러 곳을 다녀 보셨지만 마음에 평안을 얻지는 못하셨지요.
외할머니께서도 “얘야, 죽은 자식은 네 자식이 아니야. 이제 그만 마음 쓰고 잊어 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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