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회 국내·외 성경탐구모임 2006년 8월 5일 저녁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한복음 2:19-21)
이 세상은 진짜 것의 그림자나 어젯밤에 잘 때 한 꿈을 꾸었네그 옛날 예루살렘 성의 곁에 섰더니허다한 아이들이 그 묘한 소리로주 찬미하는 소리 참 청아하도다천군과 천사들이 화답함과 같이
그 꿈이 다시 변하여 그 길은 고요코호산나 찬미 소리 들리지 않는다햇빛은 아주 어둡고 그 광경 참담해이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때의 일이라이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때의 일이라
그 꿈이 다시 변하여 이 세상 다 가고그 땅을 내가 보니 그 유리 바다와그 후에 환한 영광이 다 창에 비치니그 성에 들어가는 자 영광이로다밤이나 낮이 없으니 그 영광뿐이라그 영광 예루살렘 성 영원한 곳이라이 영광 예루살렘 성 참 빛난 곳일세
예루살렘 예루살렘 그 거룩한 성아호산나 호산나 호산나 부르자호산나 노래하자 호산나 호산나 (새찬송가 654장)
저는 이 찬송가를 들으면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형제자매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다른 형제자매들이 부르는 찬송을 듣다 보면 힘이 납니다. 이 찬송가 가사의 처음에는, 한 꿈을 꾸었는데 그 꿈속에서 옛날 예루살렘 성의 곁에 서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이 변하여 이제는 영광된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먼저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오는 두 언약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종을 낳은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 라고 했고,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24-26절 참조) 지금 세상에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역사가 진행되고 있고, 예루살렘도 존재하고 있는데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처소를 준비하러 가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 요한계시록을 보면 마지막에 우리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엄청난 것이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성은 넓이와 길이와 높이가 같은 정육면체입니다. 한 면의 길이가 약 2400km인 엄청나게 큰 성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끝부분에는 지금 우리의 현실과는 다른 현실에 대한 내용이 나타나 있습니다. (21장 참조)
그러한 말씀들을 읽어보았을 때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며 즐기는 이 세상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아름답고 크고 멋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번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차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간 일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큰 나무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높이가 수십 미터나 되는 나무들이었는데,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거대했습니다. 또 만 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강당이라면 사람이 보기에는 참 넓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기준에서 보는 크기와 아름다움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로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름다움과 크기를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새 예루살렘 성에는 열두 개의 문이 있는데, 문 하나가 하나의 진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21:21 참조) 우리는 조그마한 진주알 하나 달고 다니다가 도둑맞으면 얼마나 아쉬워합니까. 그런데 새 예루살렘 성에는 문 자체가 진주 한 덩어리라니 얼마나 크고 아름답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런 내용의 성경을 보면서 이것은 영적인 표현이지 진짜 그런 성이 내려온다는 뜻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부터 생명수 강이 흘러나오고 그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고, 만국을 소생키 위해서 생명나무에서 과실과 잎사귀가 난다는 이야기도 영적인 표현일까요? (계 22:1-2 참조) 하나님의 피조물인 사람도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텔레비전 드라마에서처럼 연기와 섞여 날아다니는 존재가 됩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실제로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즐길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생선을 드시기도 했습니다. (눅 24:41-43, 요 21:10-13 참조)
앞으로 우리 눈앞에, 그리고 이 땅의 백성들 앞에 펼쳐질 새로운 세상은 영적인 세상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실제로 존재하고 모든 것이 진짜 것입니다. 그때는 지금 우리가 보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들의 진짜 것이 옵니다. 지금 우리의 생애는 전도서의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같이 보내는 일평생” (전 6:12) 이라는 말씀처럼, 또 사도 바울이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고전 7:31) 고 이야기한 것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갑니다. 솔로몬 왕이 “해 아래서” 라고 거듭 이야기한 것처럼, 해 아래에서 사는 우리의 생애와 우리가 누리는 이 세상은 언젠가 진짜 것을 맞이하기 위해 변한다는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에 나타난 성막에 대한 기록을 보면 성막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제 한 말에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 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이러므로 저도 무슨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히브리서 8:1-6)
구약 시대에 유대 민족이 제사를 지내던 성막이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또 성막 안에 있는 성소와 지성소, 지성소 안에 있는 증거궤와 속죄소, 속죄소 위를 덮는 그룹들이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성막과 성막에서 제사를 지내는 대제사장이라는 직분,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그림자로서 구약의 역사를 지나왔다는 것이 성경의 기록입니다. 진짜 것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그림자로 따로 구별된 레위 지파
그런데 성막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 전에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요셉은 형님들을 만나고 자신이 요셉임을 알리면서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창 45:8) 고 했습니다. 또 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 형들이 요셉을 찾아왔을 때에도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창 50:20)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요셉의 심정과 목소리에는, 훗날 예수를 뒤늦게 발견하고 그 앞에서 통곡하는 유대 민족을 위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이 담겨있습니다.
야곱은 죽기 전에 열두 아들을 불러 그들에 대해서 예언했습니다. 그 예언은 성경의 많은 내용들, 특히 유대 민족이 밟던 땅의 형태나 특성 등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야곱의 예언에는 그들에게 일어나는 사건들과 각 지파의 특성, 그들의 성격 같은 문제들이 그대로 보입니다. 유다에 대해서 야곱은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창 49:10) 라고 왕권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유다의 지파에서 왕들이 일어나고 그 계보에서 훗날 메시야가 태어난다는 암시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예언을 하는 중에, 야곱의 열두 아들들 중에서 조금 경시된 아들이 둘 있습니다. 시므온과 레위입니다. 그들에게는 디나라는 여동생이 있었는데, 디나는 가나안 땅에 있는 어느 추장의 아들에게 강간당했습니다. 이 추장의 아들 세겜은 디나와 결혼하고 싶어했습니다. 그 아버지 하몰은 아들과 함께 야곱을 찾아가 그 뜻을 전했고, 야곱의 아들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하고 화를 냈습니다. 하몰이 “너희가 우리와 통혼하자”고 했을 때, 이들은 꾀를 내어 그들에게 전부 할례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할례를 받아야 동생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하몰과 세겜을 비롯한 그 종족의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았고, 할례의 고통 중에 있던 삼일 째, 시므온과 레위는 하몰의 성에 들어가서 그들을 모두 죽여 버렸습니다. 이 일 후에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를 불러 “너희가 내게 여기서 피비린내가 나도록 했도다” 하고 걱정하는 말투로 이들을 꾸중합니다. (창 34장 참조) 그랬던 시므온과 레위에게 야곱은 다음과 같은 예언을 했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창세기 49:5-7)
참 이상합니다. 야곱은 르우벤에 대해 예언할 때도 르우벤이 자기 서모 빌하와 통간한 것 때문에 그가 훗날 당할 일을 예언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므온과 레위, 두 형제의 문제를 말합니다. 열두 아들 중에서 유독 이 두 아들은 함께 이야기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다른 아들들에 대해서는 각각 따로 예언을 했습니다. 납달리는 납달리대로, 베냐민은 베냐민대로, 요셉은 요셉대로 했는데 시므온과 레위만 함께 묶어 예언했습니다. 다른 형제들은 잘못한 것이 없습니까?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 던져 넣고 아버지에게 거짓말한 것도 죄인데,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시므온과 레위가 자기 여동생의 복수를 한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은 우연히 있는 일은 아닙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야곱의 첫 부인인 레아의 소생입니다. 어떻게 이 두 사람의 운명이 하나로 결정지어졌을까요. 시므온과 레위가 같은 일을 저지르고 같은 운명에 빠져있었다는 것이 야곱의 목소리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나 훗날 이 두 지파는 아주 다른 길을 걷습니다. 레위 지파와 시므온 지파는 하나님 앞에 전혀 다른 취급을 받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많은 형제들의 이야기,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요셉과 그 형제들의 이야기와 같은 맥락에 딱 맞는 이야기가 시므온과 레위 두 형제 사이에도 나타납니다.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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